어빙 고프먼의 〈수용소〉(문학과지성사, 2018)는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에 대한 선구적 연구다. 낯선 용어라고 움찔할 필요 없다. 총체적 기관이란 다수의 개인이 상당 기간 바깥 사회와 단절된 채 거주하고 일을 하는 장소다. 총체적 기관 속 개인들은 외부와 단절된 공통의 일과를 보내며, 이들은 공식적 행정의 관리 대상이다. 총체적 기관의 대표적인 예는 교도소이고, 정신병원이나 수도원(수녀원), 사관학교와 군대도 고프먼의 연구 영역이다. 번역자 심보선의 말처럼 고프먼의 총체적 기관은 미셸 푸코의 패놉티콘(Panopticon·일망 감시 시설)과 버금가는 개념이다. 하지만 수용자(관리당하는 사람)에 대한 관리자(통치자)의 일방적 권력 행사만 존재하는 푸코의 패놉티콘 개념과 달리, 고프먼은 총체적 기관에서도 수용자의 저항이 가능하고 수용자와 관리자 사이에 타협 같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아는 홀로 육성되거나 유지되지 않는다. 자아는 그가 관계하고 있거나 몸담은 기관이나 조직 속에서 안정적이 된다. 삼성인이니 고대인, 해병인이니 하는 특별한 정체성은 자아가 얼마만큼 자신과 관계 중인 기관을 애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일종의 ‘자아 부재 상태’를 뜻하는 이런 현상은 어느 기관이나 조직이든 자신의 구성원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기에 더욱 악화된다. 앞서 나열한 총체적 기관은 사회의 여느 기관보다 더 강도 높은 강제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별할 뿐,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뭇 구성원에게 자아를 이식하는 ‘식민화’는 계속된다. 

고프먼은 총체적 기관의 수용자들이 관리자에 맞서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지키는 방어기제를 정립하는지 세밀히 관찰하고 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무언가에 대항하여 형성된다.” 이 매력적인 책의 즉각적인 사용법 가운데 하나는 총체적 기관을 무대로 집필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캐치-22〉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더 재미있게 읽는 데 이용하는 것이다.

제임스 Q. 위트먼 〈히틀러의 모델, 미국〉(마티, 2018)은 제목을 한 번 더 곱씹게 만든다. 미국 여러 대학에서 유럽사와 지성사로 석·박사를 취득한 후 현재는 예일 법대에서 비교법을
가르치고 있는 지은이는 히틀러가 1935년 9월15일 선포한 뉘른베르크법의 원안이 미국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뉘른베르크법은 독일 내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약하고, 유대인과 아리안족의 혼인과 성관계를 범죄화함으로써 ‘최종 해결(홀로코스트)’을 예비했다.

히틀러는 정치 낭인 시절인 1925~1927년에 막대한 인세로 그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준 〈나의 투쟁〉을 출간했다. 면밀한 독해가 필요한 이 책에서 히틀러는 시종일관 모호하고 엄밀하지 못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에 명료함을 부가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인종주의를 도입한다. 민족주의는 상대주의를 허용하는 느슨한 개념일 수 있는 반면, 유사 과학을
동원한 인종주의는 인종 간의 차등을 확실히 정해준다. 그런데 히틀러가 보기에 서구 국가 가운데 인종주의를 확실히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관심 있는 독자는 제임스 Q. 위트먼이 〈히틀러의 모델, 미국〉 57쪽에 인용한 〈나의 투쟁〉의 한 대목을 서석연이 옮긴 〈나의 투쟁〉(범우사, 1996) 하권 109~110쪽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히틀러는 독일이 하지 못하는 인종주의 정책을 미국이 보다 합리적으로 구사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미국이 20세기 들어 세 차례(1917, 1921, 1924) 제정한 이민법은 모두 유색인 억제와 유럽인 중에서도 북유럽·서유럽 인종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은 인종법에 관한 한 세계적인 선도자였다. 미국의 활발한 법 제정은 전 세계를 감탄시켰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보다 히틀러로 하여금 미국을 더욱 경애하게 만든 것은 1876년부터 미국 흑인을 2등 시민으로 묶어둔 ‘짐 크로 법(Jim Crow Law)’과, 그가 죽고 한참 뒤인 1967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폐기된 미국의 흑백 혼혈 금지법이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의 각료들과 나치의 어용학자들은 미국의 인종 관련 법규를 치밀하게 연구했고, 그 결과가 뉘른베르크법이다.

망각을 통해 민족을 위대하게 만드는 노력

〈수용소〉
어빙 고프먼 지음
심보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서울의 기온이 111년 만에 39℃를 기록한 날, 마지막으로 추천하는 올여름의 휴가 도서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도서출판 길, 2018)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민족을 “인종적 근원 요소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앤더슨은 “민족은 혈연이 아니라 언어로 착상”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유럽 각지에서 ‘민족 만들기’가 시작된 것은 유럽을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로 만들어준 라틴어가 퇴락하면서부터이며, 라틴어의 절대적 지위를 자국어 성서가 대신하는 이 시기는 인쇄·출판 산업이 일어나는 때와 겹친다.

〈상상된 공동체〉는 민족 만들기 기획에서 신문과 소설을 우대하는데, 두 매체는 서로 모르는 사람을 ‘교감의 공동체’로 묶어주면서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신문과 소설이 어떻게 ‘민족’만 실어 날랐겠는가. 앤더슨의 후속작 〈세 깃발 아래에서〉(도서출판 길, 2009)는 똑같은 매체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아나키즘적 상상력도 함께 전파했다는 암시로 자신의 논리를 해체하는 태도를 얼핏 보여준다.

민족은 기술(記述)이라는 행위에 의해 실체를 갖추게 된다. 각 민족을 대표하는 전통 깊은 서사시, 근대 민족국가 성립기에 민족의 언어 형성과 더불어 대표의 위상을 차지한 국민 작가, 역사 교과서는 기술을 통해 민족을 늙지 않게 한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이게도 반기술(反記述) 또한 민족을 건사하는 중요한 요소다. 영국의 역사 수업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인 ‘정복자 윌리엄’이 노르만 약탈자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며, 프랑스 역사는 ‘생바르텔레미 학살’(1572년 8월24일 위그노 대학살)을, 미국 역사는 인디언 말살을, 스페인은 프랑코 장군의 반란을 망각에 부치고자 한다. 망각을 통해 민족을 정화하고 위대하게 표상하려는 반기술적 노력을 한국 근대사에서 찾아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당장 몇 개가 떠오르지만, 이 무더운 여름날 독자의 짜증을 부르고 공적(公敵)이 되기를 자청할 필요는 없다. “옛 비극들을 ‘이미 잊어야 함’이 현대 시민의 일차적 의무”다! 피서 철에는 추리소설이나 납량물처럼 부담 없는 책을 읽는다지만(도저히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읽으려고 나도 몇 권을 준비해뒀다),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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