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기념비적인 사료다. 모든 공공기관은 조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그를 위해 공공기관끼리도 치열한 내부정치를 벌인다고 정치학자들은 본다. 이 고전적인 명제가 기록으로,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확인됐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 문건 196건이 7월31일 추가로 공개됐다. 앞서 6월5일 1차 공개된 문건 98건에서는 보이지 않던 국회와 언론 관계 문건이 다수 드러났다.

문제는 이 문건의 작성자가 사법부라는 사실인데, 사법부는 이런 내부정치로부터 차단되도록 특별한 보호를 받는 기관이다. 이른바 권력의 ‘내부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최후의 기관이 있다면, 그게 사법부다. 그런데 사법부가 스스로 내부정치에 뛰어들어 ‘내부자들’로 행세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다. 이 상고법원을 따내기 위해 대법원이 이해관계자들과 벌인 일련의 게임이 내부정치의 기본 축이다. 2014년 12월 상고법원 설치법 국회 발의로 시작되어, 2015년 연말 정기국회가 끝나면서 입법이 실패할 때까지 1년이 하이라이트다. 상고법원은 입법 사안이었으므로 최우선 이해관계자는 입법부다. 그중에서도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가 핵심이다.
 

ⓒ연합뉴스2013년 4월25일 제50회 ‘법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왼쪽)과 박근혜 대통령.

2015년 3월17일 양승태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안 법사위 통과 전략 검토’ 문건을 쓴다(117번. 문건 번호는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붙인 일련번호 기준). 여기서 당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의 키맨 중 하나로 이춘석 의원을 지목한다. 117번 문건은 이렇게 쓴다. “고법에서는 위 사건을 신속 처리하기보다는 당분간 가지고 있을 필요.” ‘위 사건’이란, 이춘석 의원의 지역구(전북 익산시갑)인 익산의 박경철 시장이 재판을 받던 선거법 위반 사건이다. 법원행정처는 이 의원과 관계된 재판을 일단 들고 있으라고 권고한 것이다. 재판 일정을 일종의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양승태 대법원은 법사위 위원들의 성향과 상고법원 찬반 의견을 꼼꼼히 분류한다. 2015년 3월24일에 이르면 얼추 분류가 완성된다. ‘법사위원 대응 전략(123번 문건)’이 나온 날이다. 법사위원 성향을 상고법원 반대 5, 유보 6, 찬성 5로 분류한 후, 위원별로 대응 전략을 제안했다. 문건에는 법사위원장이던 이상민 의원(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역구 현안’ 메모가 눈에 띈다. “특허 관할 집중 법안 통과.” 이상민 의원은 특허 관련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집중시키는 법을 통과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특허법원은 이 의원의 지역구가 있는 대전광역시에 있다. 같은 해 9월17일에 쓴 142번 문건, ‘상고법원 관련 야당 대응 전략’에는 이상민 의원 설득 전략으로 더 노골적인 표현이 나온다. “내년 총선에서 유리하게 내세울 수 있는 공약의 기초 소스 제공(특허법원 관할 집중 법률안 통과 등).”

전해철 의원은 양승태 대법원의 골칫거리였다. 전 의원은 당시 법사위 야당 간사로 법안 통과의 키를 쥐고 있었으면서, 상고법원에 좀처럼 찬성하지 않고 있었다. 법원행정처는 미묘한 해법을 제안한다. 2015년 5월6일 작성한 98번 문건 제목은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對(대)국회 전략’이다. 이 문건에서 야당 측 설득 거점 중 하나로 지목된 사람은 전병헌 의원이었다. 전해철 의원과 친분이 두터우니, 그를 통해 법사위 야당 간사를 뚫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전병헌 의원은 어떻게 설득할까? 문건에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최근 개인 민원으로 법원에 먼저 연락. 민원이 해결될 경우, 이를 매개로 접촉·설득 추진.” 문건은 전병헌 의원의 ‘민원’이 무엇이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8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년 형을 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서울구치소로 들어가고 있다. 이 선고로 야당의 대법원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야당 의원 길들이고 검찰엔 영장 미끼 던져

일련의 기획에도 불구하고 법원행정처의 입법 로비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 애초 6월 임시국회 중에 통과를 목표로 한다던 상고법원 설치 법안은 하반기 정기국회로 밀리고도 기약이 보이지 않았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법원행정처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보기에,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대법원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즈음 대법원은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증거능력을 문제 삼으며 파기 환송했고,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유죄를 확정했다. 박근혜 정권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한 대법원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었다.

2015년 9월17일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야당 설득 및 대응 전략’을 쓴다(142번 문건). 문건은 “대법원이 상고법원 통과를 위하여 원세훈 사건과 한명숙 사건에서 정치적 판결을 하였다는 오해”를 야당이 하고 있다고 쓴다. 대응책으로 법원행정처는 “판결은 상고법원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이 ‘분명한 인식’이 필요한 곳은 국회가 아니라 대법원이었다. 142번 문건 작성 50일 전인 2015년 7월28일,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청와대) 설득 방안(80번 문건)’이라는 문건이 작성된다. 이 문건은 지난 6월 1차 공개 때 세상에 나왔다. 80번 문건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원세훈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등 여권에 유리한 재판 결과를 BH(청와대)에 대한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 가능.”

 

 

 

ⓒ연합뉴스8월1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초상화를 지나쳐 걷고 있다.

 

야당을 향해 “판결은 상고법원과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라던 법원행정처는, 박근혜 청와대를 향해서는 “재판 결과를 유화적 소재로 이용”하려 한다. 두 문건은 모두 양승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했다. 이 ‘전략가들’의 본업은 판사다. 이 판사들은 내부정치에 심취한 나머지 상대에 따라 논리를 바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시 142번 문건으로 돌아가자. 142번 문건은 야당 설득이 쉽지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카드로, 파격적 설득 방안 모색”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원세훈·한명숙 재판 결과로 야당의 불신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최후의 파격적 카드’란 무엇이었을까. “법사위원장과 여야 간사를 초청한 대법원장님 공관 만찬”이었다. 법원행정처의 ‘전략가들’은 대법원장이 법사위원에게 사주는 밥을 ‘최후의 파격적 카드’로 생각했다.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라 해도 밥만 사주고 법을 따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건은 대법원장이 사는 밥을 먹은 “참석 의원들이 법률안 처리 책임감과 부담감이 매우 커질 것”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법원행정처는 왜 이걸 최후에나 꺼낼 카드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멤버에 밥을 샀다가는 “대법원장님 위상에 흠이 생길 우려”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42번 문건은 이렇게 쓴다. “격에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으나, 이미 언론사 사회부장 등 그보다 훨씬 격이 낮은 인사 초청한 바 있음. 최후의 카드라는 관점에서, 어느 정도 우려되는 사정은 감수하고 추진 검토할 필요 있음.” 과대망상과 비장미가 뒤섞여 희극을 만들어낸다.

상고법원이 지지부진한 두 번째 이유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였다.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보기에, 결국 검찰 세력이 문제였다. 새누리당의 법사위 위원들은 검찰 출신이 많았다. 박근혜 청와대에서는 검찰 출신인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이 상고법원 기획을 막아섰다. 법무부는 검찰 세력 반발의 진원지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을 개별로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법원행정처는 판단했다. 이 구도에서는 결국 법무부와 대타협을 만들어내야 했다. 법무부와는 주고받기 협상이 가능해 보였다.

새로 공개된 196개 문건에서는, 상고법원 논의 초기부터 법원행정처가 이 문제를 ‘법원 대 검찰’ 구도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2015년 4월20일, 96번 문건이 작성된다.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법무부 설득 방안’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강온 양면 설득 전략에 따른 빅딜 추진” 전략을 정식으로 입안했다. 이 문건은 양승태 대법원이 법무부를 상대로 펼친 내부정치의 정본이다.

인권마저도 상고법원 거래에 이용 시도

96번 문건은 대단히 인권친화적인 의제를 던진다. 영장제도 개혁을 제안한다. 첫째, 체포·구속영장 제도를 일원화해 체포는 쉽게 하되 구속은 어렵게 만든다. 둘째, 디지털 압수수색 영장도 디지털 증거에 대해서만 한정해 작동하도록 제약한다. 인권보호 원칙을 확립하는 중요한 개혁이다. 하지만 문건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법무부·검찰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장제도의 변화를 매개로 활용”하는 것, 즉 영장제도를 카드로 법무부를 협상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던질 두 가지 인권 공세는, 협상 과정에서 검찰을 위한 선물로 돌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체포와 구속의 일원화 문제를 문건은 이렇게 설명한다. “외부에는 구속에 대한 엄격한 통제로 표방 가능. 실질적으로는 체포 상태의 수사 결과가 영장실질심사에 반영되어 구속률 높아질 가능성 있음.” 디지털 증거 문제도 압수수색 영장을 제약하는 외양을 만들되, 공안 사건의 경우 증거의 성립 기준을 새롭게 만드는 식으로 검찰의 손을 들어준다는 계획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인권 강화 조치, 실제로는 검찰에 주는 선물. 대법원 문건은 대국민 기만술을 제안하고 있다. 96번 문건에 이르면 인권은 협상판의 미끼 상품으로 전락한다.

법원행정처는 법무부에 2차관인 송무차관 신설도 미끼로 던졌다. 상고법원이 생길 경우 그에 대응하는 법무부 조직이 필요해진다는 논리다. 96번 문건은 에두르지 않고 이렇게 쓴다. “(법무부에) 최소 5명의 검사장 자리 증설 가능.” 상고법원을 받으면, 검찰의 인사 적체를 뚫어주겠다는 카드다. 인사는 예산과 더불어 내부정치 쟁탈전이 가장 치열한 자원이니, 양승태 대법원의 제안은 내부정치의 교과서에 실릴 만한 사례였다. 실현되지 않은 것만 빼면 그렇다.

양승태 대법원은 박근혜 청와대 설득에도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재판을 베팅한 로비 문제가 확인되었고, 재판 개입 의혹도 불거졌다. 청와대 로비 과정은 지난 6월 공개된 98건 문건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시사IN〉 제561호 ‘대법원 문 앞에서 삼권분립이 멈췄다’ 기사 참조).

이렇게 해서 양승태 대법원이 시도한 내부정치의 전체 그림이 드러난다. 국회와의 내부정치에서 법원이 동원한 자원은 재판, 입법 협조,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민원’을 매개로 한 거래까지 총망라되었다. 사안에 따라 의원의 민원을 들어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보여주면서 대법원은 선출 권력과의 특수 관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이것으로 법원은 독립성을 내부정치에 베팅했다.

법무부와의 내부정치에서 법원이 베팅한 자원은 인권의 수호자라는 위상이었다. 법원의 본질적 의무인 인권 보장을 좌판에 놓고, 겉으로는 인권 강화로 보이면서 실제로는 검찰 권한을 키워주는 안을 만들어 법무부와 협상하려 했다.

1차 문건 공개로 널리 알려졌듯, 양승태 대법원은 청와대와의 내부정치에서 재판 그 자체를 베팅했다. 양승태 대법원은 재판 결과를 청와대를 향한 로비 자산으로 취급했다.

독립성, 인권 수호, 재판. 양승태 대법원은 사법부의 본질을 내부정치에 걸었다. 어느 정도는 필연이었다. 독립성, 인권 수호, 재판은 애초에 사법부가 내부정치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헌법이 쥐여준 선물이니, 그 울타리를 사법부 스스로 넘어가는 순간 내부정치의 장에서 가장 가치 높은 자원이 된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사법부에 탐낼 자원은 사실상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법부의 내부정치는 독립성, 인권 수호, 재판을 베팅하지 않고는 작동하지 않는다. 사법부가 ‘내부자들’의 게임에 뛰어드는 순간 피할 수 없는 딜레마다.

우리의 맥락에서, 새로 공개된 문건 중 독특하게 흥미를 끄는 문건이 있다. 376번이다. 제목은 ‘2015년 상고법원 입법추진환경 전망과 대응 전략.’ 작성 시기는 미상이지만, 내용상 2014년 연말 혹은 2015년 연초로 추정된다. 국회, 청와대, 법무부, 언론 등 주요 플레이어들의 현황을 점검하는 익숙한 형태의 문건이다.

376번 문건은 상고법원 문제를 놓고 ‘대응 전략의 기본 방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두 가지 예시를 든다. 하나는 ‘법무부 압박·회유 병행 전략’이다. 훗날 법무부 설득 전략의 뿌리가 되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또 다른 ‘기본 방향 예시’가 눈길을 끈다. 청와대와 사법부 관계를 아예 다시 짜자며, “현 정권과 사법부 간 관계 재정립 방안”을 제안한다.


@ 배경·취지
-대법원은 사법정책 추진과 사법개혁 과제 해결을 위하여 예산과 조직 확보에 노력을 기울여옴⇒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BH(청와대)로부터 압력을 받으며 수세적인 관계를 유지⇒對(대) BH 관계에서 본질적인 한계로 작용

@ 구체적 방안
-한계를 근본적으로 탈피하기 위하여 중립적 관계, 나아가 ‘관계 단절’을 암묵적으로 천명하는 방안 적극 검토⇒예산·조직 확보 활동 중단, 인건비 등 기본 예산만으로 사법부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

@ 검토 사안
-사실상 최후 수단이므로 득실과 시점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함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그 어떤 문건과도 다르게, 376번 문건의 이 대목에는 당시의 청와대·대법원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짙게 배어 있다. ‘예산과 조직 확보 노력’ 때문에 ‘수세적 관계’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본질적 한계’를 솔직하게 진단하는 장면은 294개 문건 중 사실상 이곳 하나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만들어낸 원인인 ‘예산·조직 확보 활동을 중단’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용어로 바꾸면, 사법부가 내부정치를 중단하면 어떻게 될까. 사법부는 ‘사법부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게 된다.

이 ‘예시’는 이후 어느 문건에서도 의미 있는 대안으로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나머지 ‘예시’인 법무부 압박·회유 병행 전략이 기본 전략으로 1년 내내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이 ‘예시’는 법원이 내부정치에 뛰어들 경우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원리를, 파국이 등장하기 전에 기록으로 남겼다. 법원행정처가 쓴 문건 대부분은 정세분석 오류거나 아전인수로 확인됐다. 376번 문건의 이 한 대목은 중요한 예외다. 양승태 법원행정처의 어떤 판사에게는 이 길 끝에 있을 파국이 보였던 모양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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