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자라고 치자. 급박하게 화재 현장에 달려왔더니 사람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가족과 이웃을 구하고 귀중품을 끄집어내느라 혼이 다 나간 모습이다. 냉정하게 취재에 전념해야 할까, 아니면 마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사람들을 도와야 할까.

대한민국이 아직 군부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노태우 정권 때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비슷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불의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정부와 여당은 김영삼· 김종필 세력을 흡수하고 재벌과 유착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6·29 선언 이후 잠깐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던 사회는 맹렬하게 역주행했다. 총선 때 눈 딱 감고 촌지를 챙기려고 들면 거뜬히 아파트 중도금 정도는 벌 수 있던 시대였다. 선배들 가운데는 그런 걸 무용담이랍시고 떠들어대는 이도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당장 취재 일선에서 이탈해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권으로 달려가야 옳을 것 같았다. 야권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사람이 부족했다. 실제로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내려놓고 정치 일선으로 달려간 기자들도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정치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 쓸 만한 정치인이 될 수 있겠는가? “…….”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열렬히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정치인은 고사하고 정치인으로서 단 며칠이라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곁에서 지켜본 정치인들은 말할 수 없이 바빴다. 새벽 4시부터 움직이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가톨릭 성당이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한 정치인은 전날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셨어도 신부님 품에서 쓰러지면 쓰러졌지 새벽 미사는 거르는 법이 없었다. 김대중·김영삼 양 진영의 오래된 비서 가운데는 과로로 입이 너무 자주 헐어 비슷한 형태의 주름을 가지게 된 이들도 있었다.

ⓒ한성원 그림

의원들 가운데는 아침만 여러 끼를 먹는 사람도 흔했다. 3선에 실패한 뒤에는 조기 축구회 같은 생활체육 동호회를 쫓아다니느라 아침에 목욕탕을 다섯 군데나 들르는 정치인도 보았다. 경조사 찾아다니랴, 주례 서랴, 지역구 행사에 얼굴을 내밀랴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사람들 비위 맞추는 데도 소질이 없었다. 중진 의원들은 서울의 주류 일간지, 방송, 주·월간지, 지방 일간지, 지방 방송 기자와 간부들을 따로따로 챙겼다. 기자 개인과 회사 차원의 민원도 깨알처럼 처리해줘야 했다. 새파랗게 젊은 기자들의 반말지거리도 참아 넘겨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부정확한 기사와 추측 기사에서도 칭찬할 만한 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통 큰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나도 기자지만 그런 언론의 갑질을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지역구에서도 찾아오는 민원인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차림이 허술해 보인다고 푸대접을 했다가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지역 민원인 가운데는 워낙 부지런하게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서 만 표를 벌어주지는 못해도 만 표를 깎아먹을 능력은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지역에서 목에 힘이 들어갔다는 소리가 돌기 시작하면 만회하기 힘들었다. 그런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의정 활동과 중앙당 정치에 할애할 시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는 걸 견뎌낼 재간도 없었다. 사람들은 정치인을 싸잡아 도둑놈 아니면 사기꾼 취급하는 데 익숙했다. 행정부의 관료들은 공공연히 기자들을 붙들고 여의도 정치만 없다면 대한민국은 쌩쌩 잘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열심히 일하는 의원도 많고 전문성을 갖춘 우수한 의원도 많았지만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다. 욕먹을 짓을 하기도 하지만 억울하게 욕을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속이 쓰리더라도 악명이 무명보다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는데 나는 그만한 대인배는 못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없는 부분은 돈 문제였다. 배지도 달지 못한 야당의 부대변인도 활동비로 한 달에 최소한 500만원은 썼다. 점심때 적당히 기자들을 따돌릴 줄 알아야 그나마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은 카드를 돌려 막느라 허덕였다. 수입이라곤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배지를 달기만을 바라면서 몇 년씩 버틸 수 있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부모가 부자거나, 형제자매 중에 사업하는 이가 있거나, 배우자가 의사나 변호사거나, 혹은 스폰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알짜 상임위에서 잔뼈가 굵은 중진 의원의 보좌관들은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그들은 기업이나 이익단체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활동비를 벌었다.

배지를 단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의원들이 비서관에 친척의 이름만 올려놓고 그들의 봉급으로 지역구를 관리하는 편법을 썼다. 초선 의원들에게는 실탄을 보급해줄 중간 보스가 절실했다. 중간 보스 역시 목돈을 챙겨줄 주군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돈의 흐름에 따라 계파가 형성됐다. 다른 어떤 능력보다 돈을 조달하는 재주가 있어야 조직의 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보스가 나중에 탈이 안 날 돈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느냐에 조직의 크기가 결판났다.

하지만 큰돈을 모으든 작은 돈을 모으든 그것은 대개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런 일을 감당할 담력이 없었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지역 갈등이 아니라 공식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 큰 집에서 좋은 차 끌며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기이한 구조라고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정치를 멀리하는 게 반듯하게 사는 길이란 생각에 젖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인, 노 의원 또래의 악셀 하케(1956년생), 그리고 내 또래인 조반니 디 로렌초(1959년생)가 쓴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두 남자의 고백〉이었다. 두 사람 역시 젊은 시절에는 사회 변혁과 진보 운동에 매진하고 싶어 했지만 점차로 정치에 냉담해진 경우이다. 마음에 드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불평해온 터였다.

두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이중성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가족과 풍족한 삶을 누리기에 충분한 돈을 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탄다. 성공한 자신들이 대견하지만 의문이 든다. 이것이 과연 정의인가. 또한 정치가 많은 이들에게 이런 안락을 선사했다는 걸 잊고 산다. 마치 자기가 정치인이 안 되어 다행이라는 듯 정치인들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는 잣대를 들이대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한 연방 장관은 몇 년 전에 친인척을 어떤 자리에 추천했다가 공권력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물러나야 했다. 공적으로 얻은 마일리지를 사적으로 이용했다 해서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공무원도 있었다. 종교재판처럼 우스꽝스럽고 독선적이며 가혹한 일이 정치인을 둘러싸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당연히 독일에서는 정치가를 꿈꾸는 젊은이가 점차 줄어드는 형편이다.

독일 역사상 지금처럼 언론이 많고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늘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정치가의 말실수 하나에 벌떼처럼 달려들어 조롱하고 훈계하며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자기들이 비난이라도 받을라치면 사냥개처럼 사납게 몰려와 패거리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수마저도 언론은 봐주려고 하지 않는다. 기성 정치인은 겁에 질려 바른말을 못한다. 여론에 아첨하는 능력만 발달한다. 방송에 맞는 애매모호함으로 무장한다. 그들은 국민이란 뱀 앞에서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하는 개구리다. 두 사람은 정치인들을 욕하기에 앞서 스스로 잘못된 일을 감지하는 능력이 퇴화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노회찬 의원을 생각하면 비통하다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들다. 그는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마치 징그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듯 멀리하는 우리의 위선을 순식간에 돌아보게 만들었다. 정치인들이 돈이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깨끗하게 일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돈을 모아주는 데 얼마나 인색했는지 깨닫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기업이나 이익단체도 아니고 익명의 기부자들로부터 4000만원을 받고 정치후원금으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을 자책한 나머지 목숨을 끊을 정도로 ‘꼿꼿하게’ 살아온 정치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언론과 인터넷에 만연한 정치 혐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화가 난다. 그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소속 당이 피라냐보다 사나운 입에 의해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을 상상하며 공포에 떨지 않았을까. 살아온 궤적이나 생각이 크게 다른 야당 의원들과도 두루 친했을 정도로 품이 넓은 정치인이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누구보다 유연해 보였던 그가 결국 정치라는 위험한 물레방아에서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살려고 늘 노력해야 하지만 도덕적 잣대로만 삶을 재면 미로에 빠지기 쉽다.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은 단조로워지고 만다. 증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웃음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노회찬 의원의 유머를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만큼 우리 사회는 미묘함을 상실했다.

참고한 활자: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두 남자의 고백〉(푸른지식)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