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지난 5월15일 밤 11시쯤(현지 시각) 스웨덴 예테보리 시 란드베테르 공항 ‘짐 찾는 곳’에 막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모였다. 늦은 밤 피곤한 표정의 승객들이 빙글빙글 짐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풍경은 여느 공항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은 아이들이었다. 대개 이런 곳에서는 긴 비행을 끝내고도 아직 남아 있는 지루한 절차 앞에서 울고 보채는 아이들을 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바로 옆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주변 빈 공간에 알록달록한 실내 놀이터가 아담하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짐을 찾는 부모들의 시선 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미끄럼틀과 경사진 작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아이들은 웃고 까불었다.

ⓒ시사IN 조남진5월17일 스웨덴 ‘미취학 아동의 날’ 행사가 열린 스톡홀름의 한 공원에서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
장면 둘. 5월19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 감라스탄과 쇠데르말름 지역을 잇는 연륙교 주변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전을 위해 다리 가장자리는 모두 공사장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 가림막에는 5m 간격으로 투명한 유리창이 나 있었다. ‘공사장 전망창’이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전망창 너머로 강물 위에서 펼쳐지는 공사 풍경을 구경했다. 최근 한국 공사장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만 스톡홀름 공사장 가림막에는 ‘성인용’에 더해 ‘아동용’ 전망창도 나 있었다. 어른 키 높이의 네모난 유리창 옆마다 아이 키 높이의 동그란 유리창이 함께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조르거나 까치발을 하지 않고도 바지선이며 크레인이며 흥미로운 공사 장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스웨덴은 아이와 어른이 평등한 나라다. 어른 중심 사회에서 아이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늘 아이의 눈높이를 고려한다. 공항과 공사장처럼 지루하거나 위험한 ‘어른의 공간’에서도 스웨덴 아이들은 배제되지 않는다. 스웨덴의 아동 친화 문화는 식당에서 뽀로로 식기를 내어주는 식의 고객 서비스 차원을 뛰어넘는다. 어리고 미숙하고 약해서 배려받는 게 아니라 어른과 똑같은 권리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스웨덴의 ‘아동보호’는 시혜적인 복지정책 그 이상이다.

ⓒ시사IN 조남진스톡홀름의 한 공사장에 현장을 구경할 수 있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다. 어린이 키 높이의 창도 나 있다.
스웨덴에서 만난 아동보호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아이를 중심으로 본다”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일하는 아동보호 사회복지사, 독립된 공공 아동권익 단체에서 일하는 변호사, 아동보호 NGO에서 일하는 상담사 모두 “우리 일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중요한 원칙이 아이의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의 관점에서 그 마음을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어른 중심 국가’인 한국 어른들이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

■부모를 도와 아이 구하는 예테보리 시

전체 인구가 58만여 명인 예테보리 시는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항구를 품었고, 자동차 회사 볼보의 본사가 위치한 북유럽 무역·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브리타 티만 씨는 예테보리 시에서 아동·가족 보호를 담당하는 사회복지 공무원이다. 시에서 티만 씨가 속한 부문에 배정한 예산은 2016년 기준 14억6800만 크로나(약 1900억원). 티만 씨처럼 아동과 가족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은 시청 소속 사회복지사는 100여 명에 이른다. 아동학대 신고 접수·조사·평가 업무부터 사전 예방을 위한 가족 지원 업무까지 모두 국가와 지방정부의 ‘의무’이다.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스웨덴 언론은 가장 먼저 지자체 커뮤니티와 사회복지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보도한다. 그런 다음에 가해자를 포함한 사건과 관련된 개인을 이야기한다. 우리와 정반대다.

ⓒ시사IN 조남진아동과 가족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은 예테보리 시 사회복지사 브리타 티만 씨.
아이를 보호하는 예테보리 시의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업무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아이 중심의 관점’이다. 아이 중심 관점에서 보면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아이를 학대한 부모를 비난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쪽이 아니다. 취약한 환경에 놓인 가족을 지원해 아이를 둘러싼 가족의 울타리가 따뜻하고 튼튼해질 수 있도록 돕는 편이 아이 처지에서 가장 행복하다.

브리타 티만 씨는 “(‘도덕적 해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부모를 돕는 일이 아이에게 최선의 복지라는 명제를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모와 격리된 아이들은 늘 엄마 아빠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당장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 학대로부터 안전해진다고 해도) 여전히 엄마가 술을 마시고 아빠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은 바뀌지 않는 부모를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감옥에 있는 게 부모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 부모를 돕고 바꿔야 한다. 부모가 아이의 좋은 롤모델이 되는 게 중요하다.”

아이 중심의 관점을 지닌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티만 씨는 “우리도 요즘 가장 많이 교육받고 스스로 고민하는 지점이지만 매일 매 사건마다 어렵고 한계에 부딪치는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그들 부모나 주변 성인보다 아이들을 먼저 바라보고 이를 잊지 않고 실천할 수 있을까?’ ‘아이들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동 친화적인 사무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같은 아동 중심 사고는 사회복지 영역에서만 고민하는 주제가 아니다. 티만 씨는 “얼마 전 지역 판사들이 모인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판사들도 비슷하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더라. ‘어떻게 하면 더 아동 친화적인 법정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아동 옴부즈맨, ‘아이들이 전문가다’

가정폭력을 겪는 어린이, 난민 가정의 어린이, 장애를 지닌 어린이, 또래 괴롭힘에 시달리는 어린이, 정신 질환을 앓는 어린이, 경찰 체포와 구금 상태의 어린이, 보호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사는 어린이…. 지난 몇 년간 스웨덴의 아동 옴부즈맨(Barnombudsmannen)이 만나온 어린이들이다. 스웨덴의 아동권익 보호 공공기관인 스웨덴 아동 옴부즈맨은 매년 특정 주제의 취약 아동 실상과 정책 제안을 담은 연례 보고서를 펴낸다. 올해는 열악한 지방자치단체에 거주하는 어린이 900명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에 알렸다.

옴부즈맨은 1809년 스웨덴 의회에서 처음 창설된 국민권익 보호 제도이다. 그 어원 또한 고대 스웨덴어에서 유래했다. 국가기관이지만 독립적 권한을 바탕으로 행정부 등 다른 공공기관을 견제·감시해 국민의 권리를 구제한다. 세계 여러 나라로 이 제도가 확산됐고 한국도 국민권익위원회 등 여러 형태로 옴부즈맨이 운영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카린 파게르홀름 법무관은 “아이들은 항상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옴부즈맨의 원조 국가 스웨덴에서는 현재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의회 옴부즈맨, 민족·종교·성에 따른 차별을 감독하는 평등 옴부즈맨, 소비자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비자 옴부즈맨 등이 활동 중이다. 여기에 하나 더한 것이 바로 아동 옴부즈맨이다. 1990년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을 비준한 스웨덴은 1993년 그 협약이 자국 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감독하는 아동 옴부즈맨을 설립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안전을 누릴 권리부터 표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까지 생존·보호·발달·참여 네 가지 측면에서 아동권리를 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한국을 포함한 196개국이 비준했다. 하지만 이 조항들이 진짜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나라는 스웨덴을 포함해 몇 나라 되지 않는다.

스웨덴 아동 옴부즈맨은 매우 권위 있는 기관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정보를 청구하고 회의 개최를 위한 소집을 요구할 수 있으며 아동 관련 법률과 정책을 심의할 권한도 있다. 정부 요구가 아닌 옴부즈맨 자체의 판단으로 연례 조사의 주제를 정할 수 있고, 발간된 연례 보고서는 총리에게 직접 전달돼 아동정책 기획의 주요 근거로 쓰인다. 언론도 앞다퉈 아동 옴부즈맨의 연례 보고서 내용을 보도한다.

동시에 스웨덴 아동 옴부즈맨은 매우 비권위적인 기구이다. 특히 어린이 앞에서 그렇다. 공공기관을 조사하고 감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아니 그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옴부즈맨의 업무가 바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이 최우선이다. 아이들이야말로 어린이 권리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법과 정책을 살피고 연구자·정치인 등 ‘성인’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다. 그냥 듣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연례 보고서 말미에는 ‘어린이의 제안’이 꼭 달린다. 올해 보고서에는 “정치인들은 열악한 지역을 찾아 아이들을 직접 만나라” “체육관이나 박물관처럼 우리 지역에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을 달라” 등 취약한 지역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스웨덴 아동 옴부즈맨의 카린 파게르홀름 법무관은 아동학대 등 아동이 겪는 모든 문제에 관해 “아이들이 그 원인과 해결책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범죄가 나면 경찰, 불나면 소방관, 다치면 구급차를 부르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약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항상 온몸으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어린이와 통하는 ‘헬프 라인’

1971년 봄, 세 살배기 마리아가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다 죽었다. 마리아의 엄마와 이웃 사람들은 학대 사실을 알았지만 보복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스웨덴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대중 참여 속에 언론인과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스웨덴의 모든 아이들과 더 나은 어린 시절을 위한’ 비영리 아동권리 NGO 브리스(BRIS)를 설립했다. 1970~1980년대 체벌금지법 제정과 부모 교육 등에 브리스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대중 캠페인과 입법 제안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지만 현재 브리스 업무의 핵심은 어린이들과 통하는 ‘헬프 라인(Help line)’이다. 매일 오후 2시부터 저녁 9시까지, 스톡홀름을 포함한 스웨덴 6개 지역에 위치한 브리스 사무실에서 상담사들이 헤드셋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전화, 이메일, 온라인 채팅 등을 통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전해오는 18세 미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모든 상담은 철저히 익명이 보장된다. 상담한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 인터넷 브라우저 기록 등을 지우는 방법도 홈페이지에 친절히 설명해놓았다. 그래야 아이들이 안심하고 더 자주 찾아와 더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시사IN 조남진스톡홀름에 본부를 둔 스웨덴 아동권리 NGO 브리스. 최근 브리스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국내법으로 바꾸기 위한 운동에 집중했고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2만6000명이 브리스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에 70여 건꼴이다. 10명 중 8명이 여자아이였고 평균 나이는 14세였다. 불안, 우울, 슬픔 등 심리적 문제를 호소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았다. 가족 관계, 학교생활, 사랑, 정체성도 아이들의 고민거리였다. 섭식 장애 문제도 날로 늘고 있다. 여전히 상담의 20%가량은 폭력이 주제였다. 부모 등 어른에게 당하는 폭력은 물론이고 또래 사이의 폭력에도 아이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브리스 상담사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이런 어려움들에 대해 입을 열기를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상담사 카리네 요한손 씨는 “아이들은 입을 열고 나면 그들 삶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한다. 어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브리스 상담사들의 역할은 익명으로 얘기하는 불안하고 외로운 아이들이 다시 어른을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중간에 끊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들어주는 과정을 먼저 충분히 거쳐야 한다.

브리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사회에 요구하는 대변인이기도 하다. 폭스바겐(자동차 회사), 콤비크(통신사) 같은 기업들은 브리스에 후원도 하지만 브리스가 제공하는 아동권리 교육 프로그램에 직원들을 참여시키기도 한다. 최근 브리스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스웨덴 국내법(스웨덴 아동권리협약)으로 바꾸기 위한 운동에 집중했다. 지난 6월14일 이 법안은 스웨덴 국회를 통과했다.

아이를 위한 나라, 나아가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카리네 요한손 상담사는 아이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을 투자의 시기로 생각하지 마라. 어린 시절은 아이의 모양을 잡는 시기로서 중요하다. 유년기를 미래를 위한 투자로 생각한다면 유능한 어른을 만들 수는 있지만 내면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누리는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즐기게 하고 의미를 부여해줘야 한다. 잠시 멈춰서, 네 살 아이의 삶을 떠올려보자. 이 아이의 4년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네 살 아이의 현재 인생은 70세 노인의 인생만큼 의미가 있다.”

기자명 스톡홀름·예테보리/글 변진경 기자·사진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