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파이팅.’ 필자 중 한 명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다행히 여름은 문학과 친한 계절이다. 극단적인 날씨, 몰입하기 좋은 소설이 특히 그렇다. 올해도 여름을 앞두고 많은 소설이 출간되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한국 소설 여섯 권을 소개한다. 문예지를 만드는 작가·평론가·시각문화연구자가 각각 삶을 버티게 하는 소설, 나 자신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소설, 끔찍함을 보여주는 소설을 추천해왔다.



김신식 (시각문화연구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당신은 언제 사람이 끔찍하다고 느끼는가. 붐비는 지하철에서 시큼한 땀 냄새를 맡을 때? 누군가 어제 실컷 떠들어댄 이야기를 재차 꺼낼 때? 응원하는 팀이 상대 팀에게 지면 심판이 뒷돈을 받았다고 매번 투덜거리는 이를 맞닥뜨릴 때? 끔찍함에 관한 색인을 만든다면 그 분량은 상당하다.

당신이 근래 서점에 가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묶자면 ‘끔찍함의 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런 책들은 자신에게 불쾌함을 유발하는 타인의 생활상을 열거한 뒤 시쳇말로 ‘사이다’ 같은 대처법을 제안한다. 소개하려는 두 소설을 나란히 놓았을 때 끔찍함을 떠올렸다. 한데 소설이 역설하는 끔찍함은 의미가 조금 남다르다. 작가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과 내가 사람 자체인 사실. 정말 끔찍하지 않나요?’


〈서로의 나라에서〉송지현 외 지음 은행나무 펴냄

여기까지 읽고 당신은 벌써 후덥지근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왠지 여름 대신 겨울과 어울린다고 속닥거릴지 모르겠다. 안심해도 된다. 두 작가 모두 무겁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치를 떠는 위트 전문가다. 그렇다면 이들의 위트는 어떻게 끔찍함을 그려내고 있을까. 


먼저 〈서로의 나라에서〉에 실린 송지현(위 사진)의 ‘커튼콜, 한 번 더 박수’는 ‘피식거림’이 두드러진 소설이다. 작품은 살면서 좀처럼 되는 일이 없는 세 청년이 뇌호흡 센터에서 만나 벌이는 해프닝을 다룬다. 낭패감에 둘러싸여 방황하는 나, 사랑하는 대상에 모든 걸 쏟아야 직성이 풀리는 갱, 자살 시도라는 비화를 감춘 채 센터를 운영해온 긴. 센터에서 수련하며 친해진 세 청년은 어느 날 긴의 방에 모인다. 나와 갱은 긴의 믿음과 권유에 따라 종말을 기다린다. 재래시장에서 산 치킨을 뜯으며. 세 청년이 밤을 통과한다면 기다리던 최후의 날이 올까. 작가는 둔중한 기운을 뺀 채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다음 날을 소묘한다. 가령 갱은 ‘뭐야, 바뀐 건 하나도 없잖아’라는 식으로 긴을 책망하기보다는, 긴을 놀릴 거리가 생겼다며 출근을 준비한다.

소설을 읽고 나면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앙증맞은 캐릭터 양말을 신고 온 사람을 보고선 피식거리는 분위기가 내내 연상된다. 이는 단순히 소설 자체의 무게감을 덜기 위한 작가의 기교로만 읽히지 않는다. 송지현 작가는 작품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피식거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반문하는 듯하다. 나 한 사람이 인생을 감당하는 게 왜 이리 무겁고 끔찍한가, 그것에 치중하는 과정도 사람의 끔찍함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내가 나이기를 찾는 법, 사람이 사람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법으로 가득 찬 온갖 수련이 있다. 그런 수련법이 휴식과 명상을 외피로 두른 채 시련을 받아들이는 매뉴얼을 강권할 때, 당신과 나는 정녕 만족했을까. 시련을 마주보며 나를 찾아가자는 몰입의 과정이 에두르는 낯간지러운 인간미에 흡족해하는 대신 작가는 피식거림이라는 실천을 제안한다.


〈편협의 완성〉이갑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갑수 작가의 〈편협의 완성〉은 ‘이죽거림’이 넘실대는 소설집이다. 단 ‘냉소를 위한 냉소’ ‘빈정거림을 위한 빈정거림’에 머무르는 작품 모음집은 아니다. 작가는 이죽거림을 통해 인간 고유의 지혜를 선사한다고 간주되는 금언과 사고에 대항한다. 특히 문학을 공부하는 과학도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온 작가의 작품에선 과학에 관련된 사례·일화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가 과학을 끌어들여 말하는 문학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인간은 왜 자신의 경험담, 거기서 나타나는 슬기로움에 취해 있는가. 탈피할 수 있는 계기는 없을까.


이런 맥락에서 수록작에 다양한 인간 군상만큼 여러 사물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볼 법하다. 작가는 사물의 삶과 사람의 삶을 명랑하게 대조한다. 그러면서 ‘인간적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야유를 보낸다. 인간은 자신을 비굴하고 비루하다고 부정하면서까지 인간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죽거림과 함께. 나는 이러한 이죽거림이 조직하는 비관주의에 아직 희망을 건다. 자신에게 과하게 몰입하는 자들이 놓지 않는 인간다움에 대응하는 피식거림에도. 







기자명 김신식 (시각문화연구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