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사람됨을 보려면 그 손에 권력을 쥐여줘보라는 말이 있지. 그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성, 그리고 그릇의 크기가 드러나는 법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역으로 “누군가의 사람됨을 알려면 부당한 권력 앞에서 어떻게 저항하나 보라”고 한다면 아빠는 반대할 거야. 극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을 가려낸다면 모를까 보통 사람들은 대개 권력 앞에서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게 당연하니까.
그렇듯 권력 앞에 개인은 약해. 하지만 다들 그렇게 권력 앞에 설설 기기만 했다면 역사의 발전은 없었겠지. 누군가는 권력 앞에서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외쳤기에, 또는 “당신 마음대로 하지 말고 법대로 하시오”라고 버텼기에, 사회는 조금씩 바뀌어왔고 더 많은 이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을 거야. 오늘도 아빠는 우리 역사 속에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원칙을 지키고 법을 집행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조선 영조 때 김수팽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는 번듯한 양반 가문이 아닌 중인(中人) 신분으로 호조(戶曹)의 서리를 지낸 사람이야. 호조라는 관청은 요즘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곳이야. 나라의 살림살이를 도맡은 부서지. 그만큼 돈을 만지기 쉽고 마음만 먹으면 사리사욕을 채우기 좋은, 유혹도 많고 압력도 허다한 곳이었어. 실제로 호조나 내수사(왕실과 궁궐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 아전들은 웬만한 대감들 못지않게 돈을 벌었고 뇌물 수수나 횡령에 거리낌이 없었어. 그런데 김수팽은 진흙탕 같은 호조에 피어난 연꽃 같은 사람이었단다.
하루는 그가 지키던 창고에 높으신 대감마님이 들어오셨어. 호조 창고에는 포목, 은 등 값비싼 물건이 그득했지. 그중에 은으로 된 바둑알이 있었던 모양이야. “어허 이런 앙증맞은 게 있나.” 은 바둑알을 뜯어보던 대감마님이 은근슬쩍 그걸 주머니에 넣었어. “어흠 어흠. 우리 딸이 이번에 시집을 가는데 노리개나 좀 만들어 줘야겠네.” 어차피 높으신 어른이 가져가는 것이고, 상관이 따지고 물어도 ‘아무개 대감이 딸 시집가는 데 노리개로 쓰겠다 하셨다’고 말하면 상관은 ‘아이고 더 드리지 그랬나’ 할 게 뻔한 분위기. 그런데 김수팽은 소매를 걷고 다가와서는 은 바둑알들을 덥석덥석 주워 담았어. 대감마님은 황망할 따름. “아니 자네… 자네 뭐 하는 건가.” 그러자 김수팽은 이렇게 대답했어. “대감마님은 딸이 하나이시지만 저는 딸이 다섯이온지라.” 한 방을 제대로 맞은 대감마님은 ‘앗 뜨거라’ 은 바둑알을 내려놓고 말았어.
실상 호조는 실무를 하는 서리나 아전들이 대부분 일을 했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양반들은 빈둥빈둥 놀면서 결재만 하는 일이 잦았지. 어느 날 김수팽은 급하게 결재받을 것이 있어서 판서의 집무실을 찾았어. 결재안을 가져왔다고 말씀드렸는데 호조판서는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어. “급한 결재입니다.” 몇 번을 아뢰어도 대감은 듣는 둥 마는 둥 바둑만 두었지. 이런 상황에서 눈치 빠른 서리라면 “바쁘신데 송구합니다” 하고 물러가거나 판서를 핑계로 결재를 미루면 그만이었을 거야. 그런데 김수팽은 판서가 기절초풍할 일을 벌여.
김수팽은 번쩍 고개를 쳐들고는 계단을 뛰어올라서 한창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던 호조판서의 바둑판을 쓸어버렸단다. 호조판서나 그와 함께 바둑을 두던 이는 ‘뭐 이런 미친 자가!’ 소리를 질렀을 게 틀림없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김수팽은 이렇게 말했어. “소인은 죽을죄를 지었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미룰 수도 없고 일각이라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속히 결재를 해주십시오.” 중인 나부랭이인 서리가 정2품 호조판서의 바둑판을 엎었으니, 잘해야 곤장,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어.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거운 죄 중 하나는 ‘괘씸죄’니까. 김수팽의 얼굴에는 이미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어. “소인은 사직하고 물러가겠습니다. 다른 서리에게 일처리를 맡기십시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려 하니 판서가 달려 나와 그를 만류하고 사과했다고 해.
김수팽이 ‘개긴’ 상대는 판서에 그치지 않았어. 어느 날 밤, 호조에 궁궐 내시가 찾아온다. 내시는 왕께서 호조의 돈 수만 냥을 챙겨오라 했다고 전했어. 숙직을 하고 있던 김수팽은 어이가 없었지. 영조 41년(1765) 호조의 비축량 기록을 보면 “면포(綿布)는 7만9000필이었고, 은(銀)은 4만6700냥이었고, 동전(銅錢)은 6만 냥(김덕진, 〈조선 재정사 연구의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 2016)” 정도였으니 임금이 요구한 돈은 호조의 재정이 휘청거릴 수 있는 규모였거든.
“내가 어찌 그의 죄를 묻겠는가. 가상하구나”
김수팽은 거절해. “궁궐 문이 닫히면 금전이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게 법입니다.” 그러자 내시는 길길이 뛰었어. “지금 어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대전 내관이라면 정4품, 호조의 서리가 어떻게 해볼 대상이 아니었어. 그때 김수팽의 머리가 분주히 돌아간다. “어명이니 따라야지요.” “그럼 어서 돈을 내오라. 어명이 화급하다.” “어허 그 전에 저는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어명이라니까.”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호조의 돈을 어찌 일개 서리가 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내 얼른 결재를 받아오리다.” 김수팽은 발을 동동 구르는 내시를 뒤로하고 호조판서 집으로 향했어. 내 생각에는 아마도 김수팽은 호조판서뿐 아니라 호조좌랑, 호조참의, 호조참판 등 그의 상관들 집을 찾아 한양 일주를 한 게 아닐까 싶어. 그가 결재를 받아 돌아왔을 때는 날이 훤히 밝았다고 하니까. 그제야 김수팽은 돈을 내준다. 날 밝은 뒤에 호조에서 재물이 나가는 건 불법이 아니었으니까.
열이 잔뜩 뻗친 내시는 자신이 늦어진 이유를 김수팽에게 뒤집어씌워. 하지만 당시 영조 임금은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김수팽을 칭찬했단다. “호조 서리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에게 죄를 묻겠는가. 가상하구나.” 그렇게 김수팽의 이름은 또 한 번 빛나게 돼.
“그를 머리에 떠올리니, 마치 맑은 바람이 숙연히 그 사람으로부터 스며오는 것 같다.”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이 〈김수팽전〉을 쓰면서 한 얘기야. 아전부터 고을 수령까지, 호조의 서리부터 정승판서까지 썩어 들어가던 조선 후기, 그 역한 썩은 내음 속에서 김수팽은 실로 한줄기 맑은 바람이었겠지. 하지만 아빠는 그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해. 그의 직언(直言)과 거침없는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나마 김수팽의 충심을 이해해주는 상관들을 만났으니까. 또 자신의 어명을 대놓고 뭉갰던 서리의 충정을 알아주는 임금이 있었으니까. 나라의 법을 자신의 쌈지 속 담뱃가루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19세기 세도정치 시기 탐관오리들을 만났더라면, 법과 양심에 따르기는커녕 권력자의 뜻에 따르려 하고, 후배 판사들이 벌이는 웨이터복과 교복 코스프레를 즐기며 지위를 만끽했던 대법원장 양승태 같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아마 그에 얽힌 스토리는 ‘새드 엔딩’으로 끝났을 테니까. “저 융통성 없는 놈 당장 잘라버려!” 아니면 그 이름 석 자조차 역사에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테니까. 새삼 그 이름이 소중하구나. 김수팽. 호조의 말단 서리 그가 오늘의 대법원 판사들을 보면 무슨 소리를 할까. 아마도 눈에 불을 켜고 그 뒤를 쫓아다니면서 외치지 않을까. “나리들이 법을 어기면 어떡합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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