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압박 카드’로 등장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법관의 독립은 흥정 대상으로 전락했다. 당사자들이 삶을 걸었던 소송을 양승태 대법원(2011~2017년)이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재판을 대가로 박근혜 청와대와 주고받기를 시도한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 지난 5월25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하 특별조사단)’이 내놓은 조사 결과다.

특별조사단은 지난 1월22일 2차 조사 결과 발표 당시 암호가 설정돼 열어보지 못한 760개 파일을 추가 조사했다. 복원되지 않거나 깨져서 열리지 않은 파일을 제외한 410개를 조사했다. 이번에 드러난 내용은 법관을 사찰하고 재판에 관여하려 했다는 2차 조사 결과(〈시사IN〉 제542호 ‘법관 사찰과 재판 개입이 통상 업무라고?’ 기사 참조)를 훌쩍 뛰어넘는다.
 

ⓒ연합뉴스2013년 4월25일 법의 날 기념식에 양승태 대법원장(왼쪽 두 번째)이 박근혜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했다.

특별조사단은 이번 사건을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고 정의했다. 본질은 ‘재판 거래’ 의혹이다. 직권남용죄가 적용될 수 있는 범죄 혐의도 다수 발견되었다.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에 언급된 원세훈 사건 파기환송, 박정희 긴급조치 재심 배상 패소 등은 당시에도 논란을 샀다. 특히 KTX 여승무원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패소 판결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 아무개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대법원 판결(주심 고영한)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28~30쪽 기사 참조).  

특별조사단이 살핀 문건의 주요 대목을 발췌해 공개한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며 상고법원 설치 필요성을 설명했다(관련 내부 문건 제목 ‘(150816)VIP_면담_이후_상고법원_입법추진전략’ 등). 상고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임기 내내 집요하게 추진해온 정책이다. 법원 인사 적체 해결 등을 위해서였다. 대법원장이 깃발을 들자, 법원행정처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국회 전략을 짜거나 언론사를 상대로 간담회를 준비하기도 했다(‘(150506)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대국회전략’ ‘(150414)상고법원 관련 언론지상간담회 시행방안’ 등).

먼저 2015년 11월19일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손수 작성한 문건을 보자. “[압박카드] BH(청와대) 국정운영 기조를 고려하지 않은 독립적, 독자적 사법권 행사 의지 표명. 우선,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오른쪽 〈그림 1〉 참조)”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서 관련 재판을 나열한다. 국가배상 제한, 이석기·원세훈·김기종 사건, 통상임금·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 키코 사건, KTX 승무원·정리해고·철도노조 파업 사건,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이다. 이와 같은 사건 처리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힘을 보태왔다고 자평했다.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상고법원 추진이 BH의 비협조로 인해 좌절될 경우, 사법부로서도 더 이상 BH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해야 함.” 이와 같은 내용이 공개되면서 삼권분립의 전제로 보장되어온 사법부의 독립을 상고법원 도입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특별조사단은 “작성 자체로 부적절하다”라고 판단했다.

영장 발부가 정부에 도움을 주는 도구?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보다 우위에 있어서 상고법원 협상에 유리하다는 정무적 판단을 한 문건도 있다. 2015년 4월12일 작성된 ‘성완종 리스트 영향 분석 및 대응 방향 검토(오른쪽 〈그림 2〉 참조)’ 문건이다. 같은 해 4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새누리당 정치인 등 8명에게 돈을 줬다고 폭로한 다음 목숨을 끊은 사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기소 전까지는 적정한 영장 발부 외에는 다른 협력방안 없음”이라고 판단했다. 영장 발부조차 박근혜 정부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여긴 발상이다.
 

이어 “사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사안”을 거론한다. 사례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세계일보〉 사장 사건 등이 제시됐다. 독립된 개별 재판부가 사건을 진행하고 판단하는 데 처리 방향과 시기를 검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재판 개입을 계획한 것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은 박근혜 정부가 예민하게 여긴 사건이었다.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어 있어서다. 재판 개입이 의심되는 대목은 2015년 10월6일 작성된 ‘원세훈 사건 환송 후 당심(서울고법 2015노1998호) 심리 방향’ 문건에 나온다(오른쪽 〈그림 3〉 참조). “재판장과 주심판사(최○○ 고법판사, 28기)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라며 재판 진행에 대해 해당 재판부와 통화를 한 다른 법관이 보고서를 썼다. 이른바 ‘현관예우’다. 법복을 벗은 전관이 사건에 개입하려 한 게 아닌, 법복을 입고 있는 현관이 사건 내용을 파악하며 담당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영향을 미칠 행동을 했다. 당시는 원세훈 재판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파기환송을 거쳐, 다시 2심으로 내려와 유무죄를 다퉜다.
 

앞선 1심(부장판사 이범균)에서는 공직선거법 무죄였지만, 2심(부장판사 김상환)은 유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핵심 증거인 ‘425지논·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이 없다며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심의 결정이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논란을 매듭짓는 상황이었다. 2015년 하반기는 양승태 대법원이 다음 해 19대 국회 종료에 앞서 상고법원안을 통과시키려고 마지막 힘을 다하던 때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독립된 개별 재판에 개입하려 했음을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특별조사단은 이 문건 작성자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또한 원세훈 2심을 하루 앞두고는 대응 전략을 짜며 “24시간 감시 체제”를 계획했다. 1심 결과가 유지될 경우 법원 내 표출되는 비판을 조기에 제압하겠다는 내용이다. 1심 결과가 뒤집히면 “항소심 판결 직후 비공식 라인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설득 절차를 거침”이라는 작전도 세웠다.

박근혜 정부의 기조에 맞춰 ‘기획 소송’을 검토하기도 했다. ‘통진당 지역구 지방의원 대책 검토(내부용·대외비)’ 등이다(오른쪽 〈그림 4〉 참조). 2015년 2월13일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같은 해 8월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승진)의 컴퓨터에 저장된 문건이다. 직전인 2014년 12월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따라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5명은 의원직을 잃었지만,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지역구 기초의원 31명은 무소속 신분으로 의원직을 유지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있자, 법원행정처는 발 빠르게 내부적으로 관련 논의를 했다. 지역구 지방의원의 직을 상실시키는 방안의 개요와 문제점을 검토했다. 소 제기 후보 지역도 검토하며 “경남 지역 중 한 곳이 가장 적절해 보임”이라고 적극 의견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제소 방법도 나열하며, 박근혜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는 모양새를 보인다. 특별조사단은 이 문건이 실행되었는지, 박근혜 청와대에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직접 개입이 의심되는 문건도 있다. 위 문건이 작성된 같은 해인 2015년 9월 관련 행정소송(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 퇴직처분 취소)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담당) 재판장의 잠정적 심증 확인, 2015. 9.14 오후 늦게 선고기일 변경”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법원행정처가 관심 사건의 재판장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 방향에 대해 물었고, 선고기일을 바꿔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쓰여 있다. 재판 개입에 해당한다.
 

ⓒ시사IN 신선영5월30일 민변과 ‘사법 농단’ 피해자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협상 카드 사용’ 의혹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국민 사과 했지만 형사 조치에는 미온적

이번 특별조사단 조사로 드러난 문건들은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떠한 형식의 부당한 영향도 받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다 바칠 것을 약속한다”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취임사를 무색하게 한다. KTX 해고 승무원 등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형사 고발할 예정이다.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공개 뒤 법원 내 온도는 여론과 차이를 보인다. 불편부당한 재판에 관한 믿음과 승복의 규칙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사법부도 피해를 입은 셈이지만, 강제 수사에 대해서는 미온적이다. 3차 조사 결과가 나온 초기만해도 법관 사찰 피해자인 차성안 판사 정도가, 특별조사단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조치가 없을 경우 자신이 고발을 하겠다고 밝혔다(차 판사는 2015년 〈시사 IN〉에 상고법원보다 하급심 강화가 필요하다는 기고를 했다는 등 이유로 법원행정처의 요주의 인물이 됐다. 특별조사단의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차 판사의 공직자 재산신고 내역을 조사해 사인 간 채무까지 살폈다. 또 차 판사의 연도별 재산 변동 상황을 그래프로 만들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5월31일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형사 조치는 신중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 발전위원회’ 등 각계 의견을 종합해 결정하겠다는 의견이다.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관련 의혹을 모두 부인하자, 오히려 법원 내 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6월1일 의정부지방법원 단독.배석판사를 시작으로 6월4일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판사, 서울가정법원단독.배석판사, 인천지방법원 단독판사 등이 엄정 수사를 촉구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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