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한반도 정세가 한바탕 덜컹거렸다. 일단 북·미 관계에서 적신호가 켜졌다. 5월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김 부상은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서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선 핵폐기, 후 보상’이라는 일방적 항복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른바 ‘리비아 모델’ 논의에도 쐐기를 박았다. 같은 날 새벽 북측은 남북 고위급회담의 무기한 연기를 발표했고, 5월17일에는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맥스선더 한·미 공중연합훈련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 발언 등을 이유로 남측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백악관 관점에서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5월11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북·미 정상회담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다고 발표했지만, 그 직후 북측은 싱가포르에서 예정돼 있던 예비 접촉에 일방적으로 불참했다. 이어 나온 것이 앞서 언급한 김계관 부상의 공개 비판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북측이 그렇게 나오면 정상회담을 해도 좋고, 연기하거나 안 해도 무방하다’는 발언으로 귀결됐다.

5월22일 방미한 문재인 대통령은 분위기를 반전시켜 6·12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도록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개최 가능성을 99.9%까지 보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 귀국 하루 만인 5월24일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공개서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보인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취소 이유로 들었다. 

 

ⓒ청와대 제공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하자,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는 소통과 메시지 관리 실패가 이유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리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군사적 옵션은 배제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번에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원색적으로 펜스 부통령을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의 일개 부상이 회담 목전에서 미국 부통령에게 그런 공격을 가하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그냥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북·미 정상회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온 ‘펜스·볼턴’ 등 네오콘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싱가포르 회동의 성공 여부에 대한 회의감도 작용했다고 본다. 지금까지 논의로 보아, 남·북·미 3국 간에 북한의 비핵화가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핵폐기(CVID)’를 의미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왔다. 그런데 최선희 부상이 ‘핵무기 보유 운운하며’ CVID 수용 불가의 담화를 내자 트럼프 대통령은 6·12 회담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의제 조율의 실패라는 이야기다.

 

 

실망하기에 이르다. 북한의 비핵화는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이 와중에서도 희망적인 측면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학습효과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의 일괄타결(all in one)을 강조하면서도 북핵의 완전한 해체에는 물리적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인지해, 단계적 접근(phase-in)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리비아 모델의 ‘선 비핵화(CVID), 후 보상’에서도 반걸음 벗어나 우선 폐기와 보상을 동시 교환 선상에 놓고 체제 보장, 경제발전, 종전 선언 및 평화조약 같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 접근과는 사뭇 다른 ‘트럼프 모델’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 하겠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지 않은가.  

이제 중요한 것은 북한의 자제다. 과거와 같이 도발적으로 대응하면 파국이 온다. 그것은 네오콘의 함정에 빠지는 길이다. 지금 같은 비핵화 행보를 견지하면 북한에 유리한 국면이 곧 전개될 것이다.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의 정상 간 중재 외교 역할이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소통을 원활히 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긴밀한 공조는 필수적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아직은 패닉에 빠질 때가 아니다. 희망은 있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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