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3월21일 남북 정상회담 준비회의에서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는 이 발언이 헌법 제66조 3항(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는 비판 기사를 썼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은 당장의 통일보다는 평화를 정착시킨 뒤 통일은 자연스럽게 논의돼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 번 밝혀왔다”라고 답했다.

이 짧고 간단해 보이는 공방은 보기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햇볕정책의 설계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 공방에 담긴 의미를 짚어줄 최적임자다. 임 전 장관은 저서 〈피스메이커〉 등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개념을 강조해왔다. 임 전 장관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이 “사실상의 통일 접근법과 차이가 없다. 아주 정확한 상황 인식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의 통일 상황이라는 것은 경제·사회·문화적으로는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말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남북이 서로 노력을 해가야 법적 통일도 달성할 수 있다.”

이 ‘사실상의 통일’ 접근법은 남한 우위의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 보수 주류의 냉전적 대결주의와 다르다. 또한 민족주의적 통일 노선과도 다르다. ‘사실상의 통일’ 접근법에서 통일은 상당히 먼 미래에 달성될 결과물로, 전략적 목표라기보다는 상징적 목표에 더 가깝다. 대북정책의 전략적 목표는 통일 이전 단계, 교류협력을 축적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조정된다.
 

ⓒ연합뉴스3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준비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발언의 일부를 문제 삼았다.


세계의 냉전체제가 해체되던 1990년, 남북은 역사적인 1차 고위급회담에서 마주 앉는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보낸 남한 대표단은 상호 체제 인정, 비방·중상 중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등을 제시한다. 2018년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으로 채택된 의제들이 이때부터 들어 있다. 이 회담에서 북측은 “남측의 제안이 통일 지향적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의제들은 분단 현실을 인정하며 상호 체제를 존중하자는 것이었으니, 전략적 목표를 통일이 아니라 평화 구축으로 옮긴 것이었다.

“함께 살든 따로 살든” 발언의 ‘족보’

1997년 대선을 준비하던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노태우 정부의 주요 참모였던 임동원을 영입한다. 두 사람은 통일이 당장의 전략 목표가 아니라 먼 미래의 목표라는 데서 관점이 일치했다. ‘김대중 연구자’인 장신기 박사(김대중도서관 연구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일관을 이렇게 요약했다. “DJ(김대중)는 평화체제로 충분하다고 믿은 정치가는 아니었고, 분명한 통일론자였다. 그렇지만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공존과 교류가 상당 기간 필요하다는 인식에 동의한 단계적 통일론자였다. DJ가 ‘상당 기간’을 어느 정도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여러 정황이나 발언으로 보면 한 세대, 30년 정도를 염두에 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제 문 대통령의 “함께 살든 따로 살든” 발언의 ‘족보’가 분명해진다. 전략적 목표를 통일이 아니라 평화체제 구축에 두고, 통일은 그 목표를 성취한 후에 노력해볼 수 있는 장기적 지향점으로 돌린다. 지난해 7월6일 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구상’으로 불리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거기 이런 대목이 있다.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입니다.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

정부가 택한 평화 우선 접근법은 여론 지형에서도 인정받기가 쉽다. 국책 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은 정례적으로 통일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를 실시한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17년 조사에서 남북한 통일이 필요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57.8%,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자는 42.2%였다.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응답이 여전히 다수파다. 그런데 국민의식 조사는 “남북한이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라는 문장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찬반도 물었다. 46.1%가 제시된 문장에 동의(평화적 분단 선호)한 반면, 동의하지 않는다(통일 선호)는 응답은 31.7%였다. ‘평화 공존’을 전제로 할 경우, 통일과 분단 유지에 대한 선호도가 뒤집힌다.

 

 

 

 


통일연구원은 두 문항에 대한 응답자들의 답변을 교차 분석했다(위 〈표〉 참조). 1번 문항에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답하는 동시에 2번 문항에서 ‘평화 공존을 전제로 분단 유지’에 반대한 응답자(〈표〉의 오른쪽 위 그룹)는 일관된 통일 선호파로 볼 수 있다. 수치로는 29.3%다. 반면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답한 동시에 분단 유지에 찬성한 응답자(〈표〉의 왼쪽 아래 그룹)는 일관된 분단체제 선호파로 볼 수 있다. 34.6%다. 통일이 필요하다고는 답했으나, 평화만 보장된다면 분단 유지에 찬성한다는 응답자(〈표〉의 오른쪽 아래 그룹)는 분단체제 용인파로 볼 수 있다. 16.5%다.

이렇게 놓고 보면 평화체제를 전제로 분단 유지를 택하는 그룹이 뜻밖에 공고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분단체제 선호파와 용인파를 합쳐서 51.1%). 문재인 정부가 당장 통일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은 이를 추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함께 살든 따로 살든” 발언은 청와대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반(反)통일 논란 보도도 거의 반향을 낳지 않았다. 이 가벼운 공방전은 얼떨결에 중대한 구조변동을 드러냈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유권자들은 냉전적 통일관과 민족주의적 통일지상주의를 동시에 빠져나왔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장기간의 교류협력 이후 ‘한반도 2국가’ 체제가 정착될 것이라고 보았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계열 대북정책은 장기간의 교류협력 이후에 분위기가 숙성되면 통일이 찾아올 것이라고 보았다. 교류협력의 그림자를 충분히 길게 드리우면, 그 끝에 있는 결과물이 통일인지 아닌지가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기나긴 과정의 결과물을 놓고 그때 가서 당대의 시민들이 판단하면 될 일이며, 그 전 단계까지는 한반도 2국가 체제와 민주당 계열 대북정책의 접근법이 사실상 같은 결론을 낸다. 둘 다 통일을 전략적 목표가 아닌 먼 미래의 일로 본다. 둘 다 전략적 목표는 평화체제 구축이라고 본다. 둘 다 냉전적 통일관과 민족주의적 통일관 모두를 거부한다. ‘탈냉전 탈통일 시대’가 개막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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