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수많은 식민지에 커다란 상처와 인상적인 기념품을 동시에 남겼다. 그중 하나가 과거 영국령의 고급 호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터번을 머리에 두른 인도인 문지기들이다. 인도에서 터번을 둘러 감은 무리는 크게 둘로 나뉘다. 하나는 시크교 신자, 또 하나는 인도 서부 사막지대에 주로 모여 사는 라지푸트족이다.
시크교는 힌두와 무슬림이 싸우던 15세기에 구루(신성한 교육자) 나낙이라는 사람이 만든 종교이다. 종교가 창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굴제국에 의해 공개 처형을 당하는 등 소수 종파로 전락해 온갖 탄압을 받았다.
무굴제국이 멸망하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인도를 지배하면서, ‘분할하여 지배하라(Divide and Rule)’는 정책에 따라 각 종파들은 분리되어 관리됐다. 무굴제국의 지배자인 무슬림 엘리트들은 의도적으로 차별받았고, 피지배 계층이던 힌두교와 시크교는 세포이(Sepoy)라 불리는, 동인도회사 소속 영국군의 하부를 담당하는 직업군인이 되었다.
당시 영국군에서 인도 출신 세포이의 비중이 얼마나 컸느냐면 1860년 인도에 배치된 영국군 26만9000명 중, 실제 영국 출신은 4만6000명에 불과했다. 화약 탄포 문제로 ‘세포이 항쟁’이 촉발되었을 때 항쟁을 주도한 건 인도 동부 출신 브라만들로 이루어진 세포이들이었다. 항쟁은 초기에 들불처럼 번져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지금의 델리를 점령하고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무굴제국의 부활. 자, 여기서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세력은 누구였을까? 바로 시크교도들이었다. 그들에게 무굴은 자기 종단의 지도자를 거리에서 솥에 삶아 죽인 자들이었다. 그들의 통치가 부활한다는 건 피바람을 상징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시크교도는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항쟁이 진압된 이후 시크교도는 영국과 가장 관계가 돈독한 소수 종파가 되었다. 무굴제국 말기 스스로 종단을 지키기 위해 모든 신도가 칼을 휴대하는 등 일찌감치 종단 전체가 무력으로 일가견이 있었다. 영국은 시크교도들을 중용했고 그들은 인도제국을 벗어나 대영제국의 말단 경찰·군인 계층이 되었다.
홍콩·싱가포르·상하이가 개척되던 19세기까지도 시크교도들은 제국의 말단 역할을 충실히 했다. 지금이야 상상하기 어렵지만, 상하이 와이탄 지역은 원래 진창으로 된 강변이었다. 여기에 둑방을 쌓아 현재의 모습을 만든 게 힌두교도 인도인이었고, 그들의 현장감독이 시크교도 인도인이었다.
시크교식 인사를 건넸더니…
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과거 영국령의 최고급 호텔이라 불리는 곳에는 언제나 시크교도 문지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래플스 호텔에선 오가는 손님들이 시크교도 문지기와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홍콩에서는 최고급으로 분류되는 페닌슐라 호텔을 비롯해 어지간한 호텔에 시크교도 문지기가 있다. 마카오에 가면 전당포 도어맨으로 시크교도를 쓰는 경우도 많다. 현지인, 특히 노인들에게 터번을 두른 인도인은 경찰을 뜻한다. 즉 우리 업장은 경찰이 근무한다는 무언의 경고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관광도시의 호텔 문지기에게 시크교식 인사를 건넸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본인은 힌두교도인데 취업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있다는 슬픈 고백을 들었다. 그곳의 이름은 차마 밝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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