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스승의 날을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기사화되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과거에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이렇지 않았는데…” “교권이 땅에 떨어졌네” 등이었다. 교사를 걱정해주는 이야기 같지만, 교권 ‘침해’에 대한 걱정은 애석하게도 교권을 살려주지 못한다.

교권이란 무엇일까? 포털사이트에 교권을 검색했을 때 뜨는 백과사전 풀이를 보면 두 가지 정의가 나온다. 교권(敎權, educational authority)을 ‘정치나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주적으로 교육할 권리’, 혹은 ‘교사로서 지니는 권위나 권력’으로 설명해놓았다.

실제 교권의 의미 가운데 정치나 외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권위가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정치권력이 국정교과서를 일방적으로 만드는 것도 교권 침해이다. 일제고사와 같은 중앙 집중적인 평가를 밀어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가르친 교육과정을 대체하는 등 권력이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을 제한하는 일이 바로 ‘교권’을 침해하는 사례이다.

ⓒ박해성 그림

그런데 대부분 ‘교권’을 말할 때 사람들은 ‘교사로서 지니는 권위와 권력’이라는 정의만을 떠올린다. 교권을 침해한 주체에 대해서도 주로 학생과 학부모만 포함될 뿐, 학교 관리자의 ‘갑질’이나 교육행정기관의 부당한 명령은 빠져 있다.

교육적 권위는 심리적이든 형식적이든 교육 대상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동의를 기반으로 부여받는다. 이러한 동의를 상실했을 때 그 권위의 담지자는 진정한 교권을 잃는다. 다만 권위적인 교육자가 될 뿐이다. 동의의 자리에 강제력이 들어가면 그게 바로 ‘갑질’이다. 학생들로부터 자발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이것을 강제력으로 부여받으려 할 때 교권은 도전받는 권력이 된다.

어느 때 교권이 가부장의 얼굴을 하게 될까

학생을 누르는 힘을 교권이라고 한다면, 이 교권은 학생 인권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교사에게만 교실을 통제할 힘이 부여되어 있을 때, 학생은 교사의 처분만 기다리는 수동적 위치에 남게 된다. 교사에게만 허용된 그 힘은 온화한 지도력으로 발휘될 수 있고 카리스마로 발휘될 수 있고 ‘미친개’의 폭력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선택은 교사가 내리고 학생들은 선택을 기다린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교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교육이 전투가 될 때 교권은 가부장의 얼굴을 한다. 여교사에 대한 성희롱·성추행이 문제가 될 때도 가부장적 교권으로는 피해자인 교사의 인권 보호를 주장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페미니즘 수업을 한 교사에 대한 공격이 지속되었을 때도 ‘교권 침해’로 대접받지 못했고, 교육부 교권보호위원회는 전혀 보호 체계를 가동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교사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학교 내에서 학생들에 대한 인권의 기준부터 우뚝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폭력을 단호하게 금지하는 학교 문화에서, 학생들은 폭력이라는 수단의 지질함과 그 수단에 대한 사회적 단죄의 무서움을 배운다. 학생들이 옷차림으로 지적당하지 않을 수 있을 때, 교사에 대한 성희롱 사건에서 교사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문화도 없어진다.

더 이상 학생과 전투하게 하는 교권은 필요 없다. 교사가 존중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학교 안에서 학생 인권의 기준이 좀 더 확고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기자명 조영선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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