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들었다. 카페에서 한 번, 지하철에서 한 번, 총 두 번이었다. 하루에 서너 번도 더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대신 듣게 되니 그 말의 우연한 겹침이 무척 신기했다. 이런 것도 인생의 묘미. 10대로 보이는 이가 휴대전화로 저편의 또래에게 건넨 말과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농담 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말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싶다가 인생은 어디까지 살아야 재미있어지는 걸까, 인생의 재미에 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시사IN 신선영사는 게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 시장에 가보라는 사람이 있고 장례식장에 가보라는 사람이 있다.
사진은 힐링센터에서 임종 체험을 하고 있는 모습.

생각해본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고 보면 ‘생각’이라는 행위는 참 재미있는 인생의 부속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만이 생각하는 건 아니겠으나,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은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기에 재밌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험은 어쩌면 인간이 가장 빠르게 터득하는 인생의 재미일지도 모른다. 먹고 싸는 원초적인 재미를 넘어서 왜 먹으면 똥이 되어 나오는지를 부모에게 묻고 또 묻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드디어 그 아이를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게 한다. 어른은 그렇게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어른의 과정이라는 건 참으로 재미없는 생각. 최근에 나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서인지 쓰는 글마다 자꾸 ‘생각하다’라는 말을 반복해 적는다.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엔 궁금증이 되고 그 궁금증이 쌓이고 쌓여 결국엔 대답이 되는 과정을 ‘해소’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이즈음 참 해소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온몸에 충만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말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와카마쓰 에이스케, 〈슬픔의 비의〉)”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의 해우소(解憂所)는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고민 해결사’로 잠시 출연했다. ‘인생, 어디까지 살아봤니?’라는 이름이 붙은 코너였다. 청취자의 고민 사연을 받아 상담을 해주는 건데, 내 예상보다 고민의 수위가 높았다. 할 말보다 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았다. 굴곡진 인생사에 마음을 쏟을수록 인생을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짝꿍에게 말했더니, 짝꿍은 한술 더 떠 너는 인생의 굴곡이 없는 사람이니까, 라고 웃으며 대꾸했다. 인생의 굴곡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인생의 구불구불한 곡절이 반드시 인생의 성숙을 담보하는 것일까, 내 인생이 흥미진진해졌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에는

나는 요즘 한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른다지만, 지구대 경찰들의 굴곡진 인생을 시청하며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현실 친구의 밤낮이 염려됐고,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경찰의 생김새와 표정을 보게 됐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며 아내를, 엄마를, 시어머니를, 친구의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며 재미있었다. 그 배설의 경험이 오랜 세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잊고 있던 인생의 재미처럼 여겨졌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 시장에 가보라는 사람이 있고 장례식장에 가보라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인생을 해소해야 할 것으로 보는 사람일 테고, 후자는 인생을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는 사람일 테다. 해소하는 재미는 청자의 것이고, 해결하는 재미는 화자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내가 들은 말은 해결의 거리를 던져주고 해소의 기미를 찾는 사람(들)의 화두인 셈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