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3대 임금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어린 아들 대신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단한 권력을 휘둘렀어. 그녀가 밀어붙인 일 중 하나가 승과(僧科)의 부활이었지. 국가가 직접 나서 엘리트 승려를 뽑는 승과 제도는 고려 시대 이래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다가 폐지됐는데, 문정왕후는 유생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승과를 재실시한 거야. 문정왕후가 죽은 뒤 승과는 곧 폐지되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 승과 합격자들 가운데에는 후일 역사에 남은 승려가 여럿 있어. 대표적 인물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야.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적과 싸웠는데 서산대사는 전쟁 당시 이미 일흔을 넘은 고령이었기에 사명대사 유정이 주로 승병들을 지휘해 공을 세웠어. 사명대사는 의병장으로서도 빛나는 활약을 보였지만 외교관으로서 더욱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란다.

ⓒ연합뉴스사명대사 유정이 일본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진 ‘사명대사행일본지도’.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진 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밀어붙여. 그야말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분전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저항, 순망치한(脣亡齒寒)을 우려한 명나라 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국면이 바뀐단다. 일본군은 보급이 원활한 경상도 일원으로 철수했고 명나라 사람 심유경은 일본 장수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과 강화 협상을 벌이게 돼.

문제는 조선의 운명이 걸린 이 중차대한 협상을 명나라 사람 심유경이 나서서 하고 있었다는 거야. 조선 조정은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확한 사정을 파악해야 했지. 마침 일본 장수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회담을 요청해왔고 조선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게 돼. 가등청정은 소서행장과 경쟁 관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 그를 이용하여 정보를 캐내고 적 내부의 불화를 일으키는 등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협상가가 필요했는데 사명대사 유정이 적임자로 지목된 거지. “일반인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드물고 군사기밀도 발설될 염려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점과 임란 중에서 두드러진 활약이 인정되어 강화 협상을 담당할 적임자로 채택되었던 것이다(김문자, ‘임진왜란기 일·명 강화 교섭의 파탄에 관한 일고찰’, 2005).”

오늘날의 울산 서생포에 주둔했던 가등청정의 군영을 찾은 사명대사는 소서행장과 심유경 간에 오가던 협상의 내막을 파악하는 한편, 조선의 대표로서 치밀한 외교전을 펼쳤어. 가등청정을 만났을 때 가등청정이 휘호를 청하자 사명대사는 이런 글을 써준단다. “자기 물건이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취하지 말라.”

이건 남의 땅을 탐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침략자에게 한 방 먹이는 거지. 이윽고 너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가 등장해. 여전히 남의 물건을 탐내는 가등청정이 물었어. “조선에는 무슨 보물이 있소?” 사명대사는 엉뚱한 대답을 해. “우리나라에는 보물이 없고 일본에 큰 보물이 있지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가등청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명대사는 이렇게 외치지. “나라에서 그대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는데 금으로는 천 근이요, 벼슬로는 만 호를 가진 고을 원을 준다고 하니 이만한 보배가 어디 있겠소.”

이 얘기는 물론 사명대사의 대담함을 드러낸 일화이지만 아빠는 이 대화에서 사명대사 유정의 외교 책략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는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고, 일본군 내부의 불화를 부채질할 의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심지어 가등청정에게 “당신 같은 영웅이 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부하 노릇을 하느냐”라며 부추기기도 했어. 즉 “당신 머리가 조선의 보물”이라는 얘기는 ‘조선 사람들은 (다른 장수들은 다 허접하고) 당신을 일본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로 보고 있다’고 치켜세우는 한편 나아가 ‘당신이 풍신수길보다 위’라고 눙치는 외교적 공치사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별 같은 인물 가운데 유난히 빛난 이름

ⓒ시몽포토에이전시전라남도 해남군 표충사에 걸려 있는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초상화.

사명대사 유정은 몇 년 동안 네 차례나 가등청정과 회담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사정을 염탐해 보고하는 등 비공식 외교관 노릇을 톡톡히 한단다. 불교 승려라면 고개부터 돌렸던 조정의 신하들이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호랑이굴에 들어간 공로를 갚지 않을 수 없으니, 첨지(僉知)의 실직(實職)을 제수하여(첨지라는 관직을 내려) 뒷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을 정도란다. 전쟁 내내 외교관으로 또 의병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사명대사 유정. 하지만 전쟁 후에도 그는 쉴 수 없었어.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마도주는 다시 국교를 열어줄 것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지.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교류가 끊어지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거든. 그러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또 쳐들어올 것이라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지. 이 모든 게 대마도주의 뜻인지 일본 막부의 의중인지 알 길도 없고,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조선은 다시금 사명대사를 비공식 사절로 대마도에 파견하게 돼. 새로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평화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자 사명대사는 몇 달을 기다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후시미 성에서 덕천가강을 만났어.

일본에서 사명대사 유정이 펼친 도술 이야기나 일본인들의 속임수에 의연히 대처한 사연을 너도 여럿 들었을 거야. 그중 하나로 이런 게 있었지. 일본인들이 목욕탕으로 안내했는데 탕 바닥엔 독사가 우글거렸어. 하지만 사명대사는 태연히 염주를 탕 안에 던졌고 염주가 뱀 곁에 떨어지지 않자 아무렇지도 않게 탕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고 해. 일본인들이 탕 바닥에 유리를 깔고 사명대사를 시험했던 거지. 이런 일화는 사명대사가 덕천가강과 만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를 은연중에 설명하고 있어. 더구나 덕천가강은 조선과의 평화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대마도 쪽과는 또 다른 형편이었을 테고, 그와 평화를 논하고 조선인 포로들까지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건 매우 고난도의 외교 협상이었지. 하지만 사명대사는 그걸 해낸단다. 그의 귀국 즈음에 조선인 포로 수천명이 조선으로 송환됐고 이후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가 회복되니까 말이야.

그는 일본 방문 과정에 수많은 시를 남겼어. 이 시들을 통해 벼슬아치도 아니면서 나랏일을 떠맡아 적국을 가로지르며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을 했던, 그러나 결코 꺾임이 없었던 그의 면모를 우리는 엿볼 수 있어. “팔 굽히고 허리 꺾는 일 내 뜻이 아니거니, 어이 머리 숙여 원수의 집에 들어가나” 하고 일본으로 들어가서는, “거칠고도 먼 오랑캐 땅에 흘러와 꿈속에서나 고향 땅 그린다네. 삶과 죽음은 원래 천명에 달린 법. 어찌 갈 길 다 했다 탄식하리오” 다짐하며, “어찌 네게 되돌아올 것 생각지 않고 남의 아비 죽이고 남의 형 죽였는가” 일본인들을 꾸짖고, “네 만일 본심을 머지않아 회복한다면 그는 현인이요 너 또한 현인이라네” 달래기도 하며, “창생을 널리 구제하려는 무궁한 뜻” 즉, 포로가 된 조선인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는 모습 등등이 그의 시를 모은 〈사명당집〉에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 좀 비틀어 생각하면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선조 임금은 참으로 행운의 왕이었다 싶다. 한 임금의 치세에 별 같은 인물들이 그토록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가 있었을까. 그 가운데에서도 사명대사 유정의 이름은 유난히 빛나는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