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주요우울장애(우울증)의 평생유병률(평생 동안 한 번 이상 경험할 확률)은 남자 3.0%, 여자 6.9%로,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이상 높다. 이러한 양상이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2017년 세계보건기구가 발간한 보고서는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이 남성(3.6%)보다 여성(5.1%)에게 더 흔하다고 보고한다. 여성은 왜 남성보다 우울할까?

전국 주요 의학대학에서 사용하는 정신의학 교과서들은 그 원인을 대체로 에스트로겐에서 찾는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호르몬이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에 기분 변화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울증은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세분화되기도 한다. 생리 전 증후군,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 여성의 삶에서 우울을 경험할 일은 많고도 많다.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이들은 모두 ‘질환’으로 명명된다.  

교과서에서 여성 우울증 환자는 자주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갱년기 우울증 환자들은 “병전(발병 전) 성격이 강박적·양심적이며 융통성이 적고 책임감이 강하고 급하고 예민”하다. 우울증에 자주 동반되는 신체화 장애의 경우, 환자의 성격은 “신체 노출이 심하고 유혹적이며 이기적이고 의존적이다. 숭배받기 원하는 것처럼 보이고,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대인관계 장애도 심하다”고 설명된다. 신체화 장애는 정신적 갈등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표현되는 장애로 화병이 대표적이다. 서구보다 아시아 문화권에서 흔하고 특히 한국에서 신체화 장애의 발생 비율이 높다. 또 교육 수준이나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많이 발병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고통은 몸으로 나타난다.

ⓒ시사IN 신선영대다수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여성 우울증 환자는 자주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와 상담을 하고 있다.
가정폭력과 돌봄 노동과 최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중년의 어떤 여성을 상상해보자. 중년 여성은 우울증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다. 그가 병원에 내원해 의사에게 자신의 우울에 대해 상담하면, 의사는 아마도 에스트로겐의 변화로 급격한 폐경기를 겪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약을 처방할 테니 아침저녁으로 먹고, 콩이나 석류 등 에스트로겐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하라고 조언한다. 햇빛을 자주 보고 운동도 꾸준히 하라고 말한다. 다음 진료 때까지 우울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그의 탓이 된다. 이처럼 여성의 우울을 에스트로겐으로 한정하는 설명은 우울을 경험하는 여성의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을 삭제한다. 여성은 감정 관리를 못하는 취약한 존재가 되고 의학적 설명 외에 자신의 고통을 둘러싼 배경을 살피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맥락 없는 고통이 과연 있을까?

의학 기사에서 재생산되는 고정관념

수전 웬델은 〈거부당한 몸〉(그린비, 2013)에서 장애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말한다. 웬델은 정상성에 대한 표준을 만들고 이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온전히 사회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미묘한 사회문화적 요소에 의해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여성의 우울과 달리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으로 설명된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 성호르몬을 갖고, 또 특정한 생애주기를 경험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의학에서 표준이 되는 몸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시사IN 이명익여성의 우울은 생리나 출산 같은 생식능력과 엮여 설명된다. 위는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 사건’ 시위에서 거울을 든 시민.
이는 우울을 다룬 의학 기사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고정관념 중 하나이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꼭 생리를 한다?” (〈정신의학신문〉 2017년 12월27일)라는 제목의 기사처럼 여성의 우울은 생리나 출산과 같은 생식능력과 자주 관련된다. 하지만 남성의 우울은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가 과거보다 심해진 탓”이며 “여성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남성의 지위가 위축됐”기 때문이다(〈중앙일보〉 2014년 12월10일). 중년 여성의 우울이 폐경과 관련된 것이라면, 중년 남성의 우울은 “‘위엄 있는 아버지’를 은연중에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이 익숙지 않”은 남성들이 “어깨에 짊어진 짐들의 무게에 눌려” 초래된다(〈정신의학신문〉 2017년 10월29일). 이런 기사는 셀 수 없이 많다.

병명이 갖는 힘은 크다. 특히 정신의학은 때로 개인의 정체성까지 건드린다. 자신의 지난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보고 기억을 재조립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우울증 진단이 부정적인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진단에 따른 약물 치료는 매우 효과적이기도 하고, 또 진단을 받음으로써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을 의학의 권위를 빌려 가시화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내 주변 여성 대다수가 크게 앓았다. 싸워야 할 것이 도처에 너무 많았다. 애인과 헤어졌고 친구와 싸웠고 밥을 삼키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거나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다. 많은 친구들이 병원에 갔고 약을 먹었다. 우울증 진단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였다. 누군가는 안도했다. 스스로를 자꾸만 의심하는 사람에게 우울증 진단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공식적 인정이었다. 누군가는 상처받거나 분노했다. 의사의 말은 너무 쉽게 환자의 삶을 재단했다. 누군가에게 진단은 낙인이었다. ‘환자’임을 숨기기 위해 비보험 처리를 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성은 ‘환자’이기만 한가. 일상이 무너질 정도의 고통을 각오하면서도 기꺼이 타인과 연대하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강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성은 자신의 서사에 주도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위엄’ 있는 지식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더욱 그렇다. 과학과 의학의 권위는 높고 단단해서 우리는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가려진 지식의 꼬리표를 확인하는 일을 자주 잊곤 한다. 여성의 몸은 남자와 아이의 중간 단계인 미성숙한 것이라거나, 여성의 두뇌는 차갑고 축축해서 공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다거나, 강간이 남성의 생존전략이라는 주장을 했던 이들은 모두 제도권 내에서 인정받는 과학자였다. 과학과 의학 지식이 객관적이라는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러한 지식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 더 쉬워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자명 김민아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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