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직원들이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이하 단톡방)에서 공유한 집회 참가 지침이다. 지난 5월4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가면을 벗지 못한 채 흩어졌다. 이날 가면을 쓰고 집회에 나온 한 대한항공 직원은 “외투 안에 정비복을 입고 갔는데 사측으로 보이는 2명이 내 명찰을 보려고 얼굴을 들이밀다 사라지더라. 이게 현실이다. 저항의 의미도 있지만, (얼굴이 공개되면) 이 회사를 그만 다니게 될까 봐 가면을 썼다”라고 말했다.
공포는 막연한 게 아니다. 이들에게는 직원 1만9000명 중 약 1만1000명이 소속된 대한항공 노동조합이 있지만, 이 노조는 회사를 견제하는 세력이 아니라 “조씨 일가의 손발”이다(한 직원의 표현). 대한항공 노동조합을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게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대한항공에도 이른바 ‘민주노조’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대 구성원들에게 각인되었고, 후배들에게 암암리에 전해졌으며, 18년이 흐른 지금 가면을 써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가 ‘민주객실승무지부’의 전성기였다고 구성원들은 기억한다. 불합리한 스케줄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편한 유니폼을 개선해달라 건의하고, 조합비 회계규정을 새로이 만들었다.
그러나 “꿀 같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1년 대의원 선거구 제도가 바뀌었다. 이전에는 객실지부가 단일 선거구였으나 지부 내 몇 팀이 한 선거구로 묶이면서 나올 수 있는 대의원 수가 줄었고, 특정 팀에 민주파가 집중 배치되면서 한 명만 나올 수 있는 특정 선거구에 민주파 조합원 서너 명이 몰렸다.
그러다 보니 일명 ‘사고 선거구’가 생겼다. 처음에는 ‘사측’ 대의원 후보가 많지 않았지만 점점 민주파 쪽이 후보를 내기 어려워졌다. 특히 2004년 대의원에 입후보하려면 20명으로부터 추천서를 받도록 선거 규정이 바뀐 게 큰 장벽이었다. 민주노조 활동에 참여했던 한 전직 직원은 “회사는 팀장과 부팀장을 불러 압박을 줬다. (민주파에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면 ‘나 잘려’ ‘우리 팀 없어져’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중에는 입후보 자체를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해 모든 팀에서 회사 측이 출마를 권유한 대의원이 나왔다. 2004년 10월 선거에서 당선한 대의원 2명이 객실지부 민주파의 마지막 대의원이었다.
부당해고 인정받고 복직했지만…
2003년 회사는 이 후원금 사용에 문제가 있다는 익명의 투서가 접수되었다며 관련된 직원들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노추위는 반환을 요구한 일부 승무원들에게 후원금을 돌려주기도 했지만, 2003년 11월 승무원 15명은 노추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횡령 혐의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2005년 9월과 10월 회사는 모금액 사용으로 승무원 간 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를 들어 4명을 해고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대다수 승무원들이 자발적으로 낸 돈이고 어디에 쓰든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자필 사인을 모으기까지 했지만, 회사는 다른 승무원들로 하여금 도장을 찍어 개별 소송을 진행하게 했다. 소송 과정에서 후원금을 낸 승무원을 파악하고 압박을 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재판에서 횡령 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해고자 가운데 2명은 2006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서 부당해고임을 인정받아 복직했으나 2명 모두 객실 승무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직까지 운송 쪽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른 2명은 지노위와 중앙노동위원회, 행정법원, 고등법원에서 패했다가 대법원에서 이겼다. 대법원은 모금 자체가 노조 설립을 위한 정당한 행위임을 고려할 때 해고는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판단해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일련의 과정에서 회사 측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중앙노동위원회 단계에서 창조컨설팅 심종두 당시 대표가 대한항공을 대리했다. 심씨는 유성기업 등 노조 파괴 시나리오 작성으로 2012년 고용노동부로부터 노무사 등록을 취소당한 인물이다. 2010년 1월 부당해고임을 최종 인정받기까지 해고자 2명은 법정싸움 5년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한 명은 비행을 하지 못하고 ‘홈 스탠바이’ 상태로 있다가 석 달 만인 2010년 4월 정년을 맞았다. 또 다른 한 명은 다른 곳에 취직했다가 퇴직했다. 대법원 단계에서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김선수 변호사(법무법인 시민)는 “노동조합이 같이 투쟁해줘도 힘든데 노동자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부분이 가슴 아팠고 너무 심하지 않나 싶은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2005년을 기점으로 민주노조가 와해되자, 해고되지 않고 회사에 남은 이들은 ‘본보기’가 되었다. 공통된 증언을 종합하면, 이들은 진급이 되지 않아 근무 기간 10년은 물론 20년이 훌쩍 넘도록 대리 직급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정한 코드가 부여되어 국내선만 타거나, 국제선을 타더라도 팀에 소속되지 않고 이 팀 저 팀으로 옮겨 다녔다. 17년째 국내선만 타는 사무장도 있다. ‘저성과자’로 분류되었고 호봉이 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계량화되지 않는 업무에 대한 인사평가 제도, 그리고 동료의 감시였다. 이들은 비행을 나갈 때마다 ‘X맨’이 붙어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았다고 일관되게 증언했다. 회사 측이 같이 비행 나가는 승무원 가운데 한 명을 ‘X맨’으로 지정하면, 그가 대상을 감시해 리포트를 올리는 식이다. 그 결과 비행 한 편에 27개 ‘죄목’이 붙은 승무원도 있었다. 한 승무원은 “노무나 인사 쪽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인사상 불이익이) 노조 활동 때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노조 활동 잘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본보기였다. 그동안 고공 농성하는 심정으로 비행을 했다”라고 말했다. 전국에 산재한 정비부서의 경우 회사 시설이 인사 불이익에 이용되기도 했다. 대한항공의 한 정비 직원은 “회사는 ‘민주노조’에 가담한 사람들을 제주 정석비행장으로 몇 년씩 ‘귀양’ 보냈다.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고 가족들 거처도 고려하지 않아 고통이 컸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급이 안 되는 이유를 묻자 팀장에게서 ‘노조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아무리 올려도 안 된다’는 답을 들은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약 50명 가운데 이런 현실을 견디다 못해 회사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회사 쪽으로 넘어간 이들도 있었는데 이는 또 다른 상처였다. 사측에서 활동하진 않더라도 회사의 ‘공포 정치’에 “눈 감고 귀 막고” 회사 생활을 한 이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노조 활동을 했다가 우울증을 겪거나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노조 활동을 함께했다가 회사를 그만둔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역시 노조 활동을 같이하다가 인사 발령으로 회사 쪽 관련 업무를 맡아야 했던 또 다른 직원도 목숨을 끊었다.
“당당함에 저 하나를 추가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다. 당시 상황을 폭로한 박창진 전 사무장은 ‘나 홀로’ 투쟁을 하다,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되었다. 또 3년여 뒤 ‘물컵 갑질’이 터지고 조현민 전 전무의 폭언 음성파일을 한 직원이 언론에 제보했다. 그 제보자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다른 직원이 ‘단톡방’을 열고 회장 일가의 갑질·불법 제보를 받았다. 이들은 급기야 오프라인으로 나와 첫 집회를 열었다. 비록 가면을 썼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한 직원은 “어용 노조와 싸우다 진 패잔병으로 15년간 눈 감고 귀 닫고 살았습니다. 능력으로 직장생활 합시다. 당당함에 저 하나를 추가합니다”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가면을 벗었다.
직원들은 가면을 쓰지만, 그때처럼 당하지 않으려 애쓴다. 변호사 조언을 받아 언론사를 통한 스토리펀딩으로 집회 비용을 마련하고, 회사에선 절대 집회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한다.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한 직원은 “SNS도 없던 시절 우리는 비행 나가면 서로의 소식을 잘 알지 못했고, 이슈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년 전 불씨는 일부 ‘각성된’ 노조 간부들만의 아픔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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