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댓글이 달렸다. ‘비는 맞는 것보다 보는 게 좋고 보는 것보다 듣는 게 좋다.’ ‘이은하의 봄비나 들으면서 부침개 부쳐 먹어야겠다.’ 각각 최다 추천 1, 2위였다. 별말 아닌 말이 하이쿠(일본 고유의 짧은 시)처럼 콕 박혀 나도 추천을 눌러버렸다. 정치·사회 기사에 거친 댓글을 쏟아내는 이들과 봄비에 반응하는 저들은 동일 인물일까. 그럴 것 같다. 화나고 불만에 찬 사람도 여리고 섬세한 감성으로 ‘원위치’시켜놓는 게 자연이니까.
봄기운에 들썩여 나도 나들이를 갔다. 꽃놀이가 아니라 음악놀이. 장소는 선배 부부의 단골 LP바다. 삼면을 차지한 빼곡한 LP판은 도열한 벚나무만큼이나 내겐 황홀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구석구석 숨어 있는 스피커에선 강렬한 기타 사운드가 벚꽃처럼 터지고 어둑한 조명은 봄밤인 양 포근하다. 테이블 저편에 박경리 선생이 담배를 문 커다란 흑백 사진에선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통로 쪽 공중전화 박스처럼 생긴 공간에는 이런 표지가 붙어 있다. ‘Smoking Area.’
선배 언니와 그 남편은 건축가 부부다. 본업 외에 책과 음악을 즐긴다. 건축업도 비즈니스라서 거래처 관리를 위해 술과 골프를 하는 업계 관행이 있는데, 선배 부부는 남성적인 향응 문화가 몸에 맞지 않는다며 꺼렸다. 대신 자신들의 작업과 세계관을 알리는 책을 꾸준히 펴냈고 독자를 고객으로 만들어갔다. 업무의 피로는 음악으로 푼다. 퇴근 후 혼자 혹은 둘이 이곳에 들러 와인 한잔하면서 음악을 듣다 간다고 했다.
‘먹고사니즘’에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선뜻 내어주지 않고도 묵묵히 일해오는 걸 나는 20여 년 지켜봤다. 두 사람은 “오직 나만의 슬픔과 기쁨으로 짠 피륙(19쪽)”을 가진 부자다. 언니는 그날도 자리에 앉자마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신청곡을 써냈다. 테이블 위에 고개를 수그린 채 가수와 곡명을 적는 옆모습은 소녀였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분식집에도 ‘디제이 박스’가 있어서 떡볶이를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엘턴 존의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를 한껏 멋 부려 적어내곤 했다. 신청곡을 쓸 때, 기다릴 때, 그 음악이 나올 때, 가슴이 점층법으로 부푸는 기분을 실로 오랜만에 느꼈다.
“여기 LP가 몇 장인지 사장님도 모르거든. 40년 동안 모은 거니까. 그래서 하루는 심심해서 사장님이랑 둘이 작심하고 세어봤다니까.” 선배의 남편이 들떠서 말했다. 1만6000장이라고 했다. 나는 음반의 양보다 세는 행위의 지체 없음에 입이 벌어졌다. 행과 열을 나누고 구역을 배분해 세고 적고 더하고. 아무런 쓸모없는 짓을 하다니 웃음이 났지만, 깊은 심심함에 처한 중년의 놀이로는 기발하고 더할 나위 없다 싶었다.
나를 나로 환원시키는 시간
“나를 방목한다/ 빈둥빈둥/ 내가 사랑하는 어슬렁어슬렁이다// (…) 속도와 움직임 다 버린다/ 그냥 햇살/ 그냥 해찰이다(40쪽).”
저녁 9시가 넘자 정장 차림의 직장인 무리가 들어온다. 그들의 신청곡일까.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흐르고 흥성흥성 말이 피어난다. 삼겹살집 지글거림이나 노래방의 왁자함이 아닌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듣고 노래에 얽힌 사연을 곁들이는 장면은 회식이라기보다 누구도 배제되는 사람 없는 민주적인 ‘봄 회의’ 같았다. “봄과 슬픔을 투시하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 발언하리(38쪽).”
우리는 레드 제플린을 시작으로 올드 록 뮤직을 듣다가 너바나의 ‘컴 애즈 유 아(Come as You Are)’까지 도달했다. “센티멘털만이 서럽게 기타 줄을 튕기(62쪽)”는 봄밤, 음악은 봄비처럼 본래 감성을 두드려 깨운다. 나를 나로 환원시키는 시간, “나도 모르는 나의 깊이(20쪽)”를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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