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했던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화해를 부르짖는 움직임이 있었어. 오늘은 남과 북이 칼날처럼 맞섰던 시기에 평화를 꿈꾸고 변화를 모색하려던, 그래서 온갖 고난의 짐을 평생 지고 살거나 자신의 목숨으로 꿈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나이로 스무 살, 그야말로 ‘입대 적령기’가 된 서울중학교 5학년생이 있었어. 이름은 김낙중. 삽시간에 서울과 경기도를 장악한 인민군은 남한 청년들을 끌어모아 ‘의용군’을 만들었어. 김낙중은 산골짜기에 땅굴을 파고 숨어 살면서 의용군행을 모면했지. 낮에는 군대 병원에서 부상자와 사망자를 돌보고 밤에는 공부를 하던 그는 또래 젊은이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걸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단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였어. “도대체 이놈의 사회가 무엇인데 사람을 서로 죽이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프레시안〉 2014년 1월31일).”

ⓒ향린교회 제공2012년 6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향린교회에서 김낙중씨가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54년 김낙중은 그로서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으나 당시 사람들 보기에는 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행동을 벌인다. 부산 번화가인 광복동에서 머리를 박박 깎고 소복을 입고 ‘탐루(探淚:눈물을 찾음)’라고 쓴 등불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인 거야.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평화적으로 같이 살길을 찾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라는 거였어. 전쟁을 더 하자고, 북진하자고 데모를 하는 형편에 북한과 평화를 얘기한다는 건 “나는 미쳤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일과 같았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신병원에 끌려가. 이후 김낙중은 남북 수천만 사람들의 피눈물을 멎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이라는 것을 작성해 경무대(요즘의 청와대)에 보낸단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이야기는 생략할게. ‘미친놈’ 취급을 받던 김낙중은 한 경찰 간부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단다. “북한이 적화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데 평화통일이 되겠느냐.” 이게 김낙중에게는 원효 대사의 해골 썩은 물 같은 깨달음의 계기가 돼. “아, 그럼 북한으로 가보자.”

전쟁이 끝난 지 2년, 스물다섯 살 청년 김낙중은 고무 튜브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갔어. 자신의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을 몸에 간직한 채로. 북한에선 그를 어떻게 봤겠니? 대학생이라는 한 남조선 젊은이가 ‘통일방안’까지 몸에 지니고 죽음을 무릅쓴 채 임진강을 건너왔다? “동무 간첩이지?”가 당연한 반응이었지. 김낙중은 감옥에 끌려가서 엄중한 취조를 받아. 압박에 못 이겨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더니 냉큼 사형선고가 떨어졌어. 하지만 당시 북한은 남쪽에 평화 공세를 펼치던 때라 그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남쪽으로 돌려보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듯해. 김낙중은 북으로 간 지 거의 1년 만에 남으로 돌아오게 된단다.

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어. 돌아오자마자 간첩 혐의로 구속되기 시작해서 이후 몇 번이나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고, 도합 18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으니까. 김낙중의 오랜 친구인 남재희 전 장관은 이렇게 친구의 삶을 표현했더구나. “김낙중은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본다. 돈키호테처럼 시대와 상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좋은 산초 판사 역할을 해주었더라면 싶은데 그렇게는 못한 것 같다(〈진보열전〉, 메디치).”

폐 한쪽 없는 몸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왔지만

ⓒ푸른역사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그의 절친한 친구 황태성(왼쪽부터).

1961년 8월 말 김낙중이 헤엄쳐 건넌 임진강을 또 한 명의 돈키호테가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렀어. 김낙중이 팔팔한 젊은이였다면 이 사람은 쉰여섯의 반백이었지. 이름은 황태성. 북한 무역상 부상이라는 고위 관직까지 지냈으며 병으로 폐 한쪽을 들어냈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에 온 까닭은 석 달 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을 만나기 위해서였어.

황태성은 일제 때부터 소문난 반골이었어. 항일운동으로 몇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렸던 그는 고향 김천과 선산 지역에서 일본 경찰들을 잔뜩 긴장시켰던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한 조선인)’이었지. 그와 함께 청년운동을 주도한 박상희라는 사람이 있었어. 둘이 얼마나 절친했는지 황태성이 중매를 서자 박상희는 부인 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응낙했을 정도니까. 박상희에게는 똑똑해 보이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은 친형보다 황태성을 더 잘 따랐다고 해. 그가 바로 박정희였어.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에도 황태성의 의견을 들었고, 해방 뒤에는 황태성의 영향으로 남조선 노동당 군사 총책까지 맡았다가 전향했던 박정희. 황태성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로서” 박정희를 만나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설득해보겠다고 ‘밀사’를 자청했다는구나.

군 내 남로당 인맥을 고스란히 넘긴 대가로 목숨을 건지고, “반공을 국시로 한다”라고 선언한 쿠데타의 수장 박정희였지만 황태성은 과거 박정희와의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을 가져올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돈키호테가 풍차로 달려들듯 폐 한쪽이 없는 중년의 몸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온 이유였겠지. 그러나 이 열정적인 돈키호테에게 들이닥친 현실 또한 매정했어. 그토록 반공을 내세웠건만 박정희는 남로당 전력으로 인해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를 들었고 미국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거든. 그런 박정희에게 북으로부터 밀사가 찾아왔다면 의혹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지. 황태성은 결국 중앙정보부에 체포됐어.

황태성이 언젠가는 민족을 위해 써먹을 수 있으니 만주군관학교에 가라고 격려해주었고 황태성을 통해 남로당에 입당했던 군인 박정희는 옛 선배를 끝내 만나지 않았어. 사진으로만 황태성을 접하며 “황 선생님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하시는구나” 중얼거렸다지. 죽여야 한다고 들이미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꼭 죽여야 하나?”라고 반복해 물었다지만 분단의 독기는 끝내 황태성의 목숨을 끊고 말았다.

“시대와 상황이 맞지 않는데” 단기필마로 뭔가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이를 흔히 돈키호테라고 부르지.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 같아. 곡식을 빻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살과 피를 갈아붙이고 시대의 장애물로 선 풍차들은 역사에 부지기수로 많았어. 또 거기에 돌진한 돈키호테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 풍차는 멈추지 않았을 거야. 아빠는 산초 판사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구나. ‘무모한 돈키호테’라고 비웃지 않고, 쓰러진 이를 돌보고 부축해 일으키는 산초 판사 말이야. 남북 정상회담을 접하고 드는 많은 상념 중의 하나란다. 역사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소리 없이 돌진하고 있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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