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1936년 8월의 어느 날 새벽,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집 앞에 뿌려진 호외의 뒷면에다가 휘갈겨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이야. 식민지 백성이 “전 세계 인류를 향해 우리도 강한 민족이다! 봤냐?”라고 외치고 싶게 만든 호외는 어떤 소식을 담고 있었을까?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는 뉴스였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베를린의 쾌거를 기뻐하다가 손기정 가슴팍의 일장기에 ‘빈정이 상해서’ 일장기를 박박 지워버리기도 했고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조선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손군 만세’ ‘남군 만세’ 소리가 드높았단다. 특히 금메달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지. 그런데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아. 오늘은 그분의 이야기를 잠깐 들려줄게.

남승룡은 전라남도 순천이 고향이지. 순천 공립보통학교 학적부가 남아 있는데 교사는 남승룡 어린이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는구나. ‘침착, 과묵하고 진실한 편이나 좀 화를 잘 낸다.’ 요즘 말로 하면 좀 ‘까칠한’ 성격이었다고나 할까. 사촌형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걸 보고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마라톤 선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1932년 전 조선 육상선수권대회 5000m와 1만m를 휩쓸고 육상 명문 양정고보(손기정 선수도 이 학교 출신이다)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신문 배달과 학업을 병행하며 달리고 또 달렸어.

1935년 일본 건국기념 마라톤대회에서 남승룡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전년도에도 우승을 차지한 남승룡은 역주를 거듭하던 중 별안간 달려든 자동차에 치여 나동그라졌단다.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지만 잠시 후 입을 더 크게 벌리게 돼. 차에 치였던 남승룡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거야. ‘점점이 떨어지는 선혈을 길 위에 뿌리면서 나머지 4㎞를 끝까지 달렸을 뿐 아니라 마침내 1착으로 골인하고 말았던 것이다(손환·이상우, 〈남승룡의 생애와 체육활동에 대한 연구〉, 한국체육학회지 제46권).’ 이 사고로 그는 6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졌어. 하지만 그 기간에도 독하게 훈련을 계속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 선발전에 기어코 출전해.

둘 중 한 명만 선발하려 했던 일본의 잔꾀

ⓒAP Photo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연단 맨 왼쪽).
일본인들은 고민이 많았어. 마라톤 출전 선수는 한 나라에 3명으로 제한돼 있었는데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에 조선인이 김은배·권태하 이렇게 둘이나 나갔단 말이야. 그래서 일본 육상협회는 잔꾀를 쓴다. 일본인 두 명을 선발하고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손기정을 데려가되 남승룡이 2위 이하로 떨어질 경우 탈락시키는 ‘작전’을 짰지. 손기정과 남승룡도 이 잔꾀를 뻔히 알고 있었어. 이 음모를 분쇄하려면 남승룡이 1위를 해야 했지. 손기정의 증언이야. “나는 남형이 독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내 꽁무니만 죽자고 따라 쫓는 시오아쿠와 스즈키를 떨어뜨리는 작전을 썼다. 내가 스피드를 내면 다급히 쫓아 붙었고 템포를 늦추면 따라서 천천히 뛰었다(〈동아일보〉 1976년 1월14일자).” 일본 선수들이 손기정의 페이스에 말려 헉헉대는 동안 남승룡은 당당히 1위를 차지했어.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베를린 현지에 기어코 일본 선수 두 명을 데리고 갔고 엔트리 제출 닷새 전 일본인 코치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부른다. “일본의 국책(國策)이다. 너희 둘 중 한 명은 빠져줘야겠다.” 이때 둘은 또 한 번 의기투합한다. 남승룡의 증언이야. “최악의 경우 출전을 포기하기로 하고 스위스로 망명까지 생각하면서 두 사람 모두 출전할 수 있는 작전에 들어갔다. 나는 손군이 뛰기로 합의했다고 미루고 손군은 내가 뛰기로 했다고 미루었다(〈동아일보〉 1975년 1월23일자).” 즉 누가 빠지겠는가 묻는 일본인 코치에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버틴 거야. 결국 일본은 올림픽 역사에 다시없을 코미디를 벌인다. 대회 개막 사흘 전에 ‘최종 선발전’을 치른 거지.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미 그에 대비하고 있었어. 현지의 최종 선발전에서 네 사람이 뛰었다. 한 일본 선수는 최종 선발전에 나섰지만 쓰러져버렸어. 나머지 일본인 선수는 도저히 안 되겠던지 지름길로 돌아 뛰는 꼼수를 부렸어. 이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남승룡은 사색이 된 일본 선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분노의 주먹을 날려. 일본 선수는 반항도 못하고 두들겨 맞았다는구나. 이 난리를 치르고 남승룡은 베를린 스타디움에 입성했고 동메달을 차지한 거야.  

시상대에서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한 번도 웃지 않았고 메달의 기쁨을 과시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무슨 벌이라도 서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 남승룡은 손기정이 부러웠다고 회고했어. 메달의 색깔이 탐났던 게 아니라 손기정은 히틀러가 준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보면 남승룡의 바지는 어색할 만큼 올라가 있어. 일장기를 어떻게든 덮어보고 싶어 몸부림친 흔적이라지.

해방 이후에도 조선은 마라톤 강국이었어. 1947년 조선 마라톤 팀은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는데 남승룡은 코치 겸 선수로 출전했어. 서른여섯 살.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였지만 그래도 그는 보스턴 거리를 달렸어. ‘태극기를 달고 우승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과 새까만 후배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 역할, 이렇게 두 가지 목적이었지. 첫 국제 대회에 주눅이 잔뜩 든 서윤복에게 용기를 북돋우면서 레이스에 나선 남승룡은 태극기를 달고 끝까지 완주한다. 서윤복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데 그는 남승룡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토로했단다.

1960년대 초반까지 육상계에 몸담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해야 육상이 발전한다”라며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나온 그는 이후 평생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어. 손기정이 ‘고생은 같이 하고 빛은 나만 본다’며 안타까워했듯 1등에 목매는 한국인들은 ‘동메달’ 남승룡에게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가졌고 대접도 덜 했으니까. 1996년 베를린 올림픽 60주년을 맞아 후배 체육인들이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나란히 ‘금메달’을 선사했을 때 반색한 건 손기정이었어. “후배들 덕분에 남 선배에게 진 빚을 갚는 기분입니다(〈동아일보〉 1996년 9월8일자).” 그 후 남승룡은 다시 세상의 기억과 시선으로부터 사라졌고 2001년 2월20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어. 유족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 “1등과 3등의 차이는 엄연한 사실이고 1등이 우대받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3등으로 인해 느꼈던 서글픔도 컸습니다.” 그놈의 등수가 뭐라고.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면서도 달렸던 불굴의 마라토너, 30대 중반에 새까만 후배의 페이스메이커를 마다하지 않고 42.195㎞를 완주한 스포츠맨의 전설을 한국 사람들은 어찌 그리 쉽게 잊었을까. 어찌하여 찬찬히 돌아보지 않았던 것일까. 남승룡. 그는 위대한 마라토너였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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