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25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지시를 뜻하는 ‘7-25-15 VIP’ 메모에는 ‘삼성 1. 승마협(회) 2. 재단 문화/체육 3. 경북(창조경제)센터’라고 쓰여 있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 작업 일환으로 평가되던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이 성사된 지 8일 후 독대였다. ‘승마협회’라고만 적힌 부분의 의미는 수첩에 좀 더 자세히 적어놓았다. ‘7-24-15 VIP-③’ 부분에는 ‘3. 승마협회. 이영국 부회장, 권오택 총무이사-임원들 문제. 예산 지원, 사업 추진×. 위 두 사람 문제→교체. 김재열 직계 전무’라고 되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사초(史草)라 평가받는 안종범 업무수첩 내용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은 나중에 법정에 나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면담 때 나눈 대화 내용이 맞다”라고 증언했다.

ⓒ시사IN 신선영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김진동 부장판사)는 박근혜·최순실씨의 뇌물 수수 공모관계나 이 부회장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관여를 인정하며 (정황)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 수첩 내용을 인용했다. 1심 재판부는 박근혜·이재용 피고인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 등의 간접 사실에 대해 증거능력과 증거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 항소심 판결에서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배척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당사자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하지 않는 이상 수첩 내용은 정황증거로서도 증거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앞서 문형표·홍완선 피고인이나 이화여대 입시 비리 관련 김경숙 피고인, 차은택 피고인, 김종·장시호 피고인 등 다른 국정 농단 재판의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에서는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모두 인정해왔다.

“안종범 업무수첩 증거능력이 대법원 쟁점”

지난 2월8일 박영수 특검은 상고장을 제출했다. 통상 대법원으로 넘어온 사건은 우선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심리한다. 소부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기존 판례를 변경해야 할 경우 13명 대법관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배당한다. 이 사건의 경우 1·2심 판결뿐 아니라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에 대한 판결이 엇갈리면서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것으로 보인다(아래 〈표〉 참조).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원에서 가장 먼저 다툴 쟁점은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리:전혜원 기자
디자인:최예린 기자

증거능력이나 법리 적용이 타당한지를 다투는 대법원에서는 가장 법정형이 높은 재산국외도피죄 관련 법리 적용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 재판부는 삼성의 독일 송금이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법령에 위반해 국외로 도피시킨 재산국외도피죄에 해당한다는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산국외도피란 재산을 ‘자신이’ 해외에서 쓰려고 하는 것인데 이 사건에서는 뇌물 수수자인 최순실씨가 재산을 관리했으며, 이 부회장 등은 뇌물을 숨기려 했을 뿐 재산을 도피시킨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판례와 비교해보더라도 이례적인 논리 전개라는 비판을 받는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제3자 뇌물죄의 구성요건이 되는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서 포괄적 현안인 ‘승계 작업’이 존재한다고 본 원심을 깼다. 승계 작업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부정한 청탁도 없었다며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과 관련한 제3자 뇌물죄를 무죄로 판단했다. 이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그룹 대주주의 이익에 연결되는 사안임을 인정한 홍완선(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1·2심, 문형표(전 보건복지부 장관) 2심 판결과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두 사람은 1·2심 모두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36억여 원 뇌물·횡령이 인정된 데 비하면 형량이 지나치게 낮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경북도청 이전 추진단장 등에게 10억원 뇌물 공여한 사건이 징역 2년6개월, 청주시 공무원에게 6억6000만원을 뇌물 공여한 사건이 징역 1년, 양산시장 등에게 5억7000만원을 뇌물 공여한 사건이 징역 1년을 선고받는 등 억대 뇌물 공여 사건은 뇌물 공여 범죄 하나만으로도 실형이 선고된 사례들이 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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