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인물 묘사를 읽고 머릿속에 몽타주를 그려보자. “피부색은 거의 검정색이었고 윗입술 위의 검은 솜털은 거의 콧수염 같았다. 크고 단호한 입과 턱을 가졌고, 거대하고 꿰뚫어보는 듯한 튀어나온 갈색 눈을 가졌다.” (〈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콜린스, 1860) 놀랍게도 이 문장이 묘사하는 대상은 여성 탐정 ‘메리언’이다. 작가가 여성 탐정의 외양을 이렇게도 기괴하게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계정민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최근 펴낸 〈범죄소설의 계보학〉(소나무)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셜록 홈스’나 ‘오귀스트 뒤팽’ 등 남성 탐정들은 섹시한데 여성 탐정들은 흉측한가? 왜 성공한 여성 탐정 캐릭터는 오로지 노처녀나 할머니뿐인가? 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팜므 파탈’은 파국을 맞는가? 19세기 초·중반 없어서 못 팔았던 장르가 왜 일거에 자취를 감추었나? 계 교수는 각 난제에 답을 찾는 과정이 “문학사에서 저평가되어온 범죄소설에 문화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범죄소설은 삼류소설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기 위한 증거다. 2월1일 계정민 교수를 만났다.

ⓒ시사IN 신선영계정민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대중은 범죄문학을 읽으며 계급·인종·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을 수용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범죄소설에 대한 책을 내놓게 됐나?

1990년대 초 미국 유학 당시 학계에서 범죄소설의 인기가 뜨거웠다. 1990년 현대어문학회(MLA)가 연례 학술대회에서 추리소설을 주제로 세션 3개를 구성한 일이 상징적 사건이다. 현대어문학회는 미국을 대표할 정도로 권위 있는 어문학 학술단체다. 문화 충격을 받았다. 국내 교수들은 토머스 하디나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칭찬해도 추리소설을 보고 있으면 ‘이런 거 보지 마라’ 하던 때였으니(웃음).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이 주제로 글을 쓴 것은 10년쯤 된다. 발표한 논문 15편 정도를 교양서로 녹여 쓴 책이 〈범죄소설의 계보학〉이다.

범죄소설은 추리소설과 어떻게 다른가?

추리소설이 범죄소설에 속한다. 범죄소설이라는 장르를 뉴게이트 소설,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세 갈래로 나눴다. 뉴게이트 소설은 1830년부터 1847년까지 영국에서 출판된 범죄소설이다. 추리소설은 셜록 홈스나 뒤팽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널리 알려져 있는 부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1920년대 초 미국에서 등장한 폭력적·선정적 범죄소설이다.

뉴게이트 소설이라는 장르는 국내에서 생소하다.

그렇다. 국내에는 단 한 권도 소개되지 못했다. 그게 문제의식의 시작이다. 1830~1840년대 뉴게이트 소설은 영국과 주변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였다. 이 소설들은 범죄를 다루되 그 배경에 주목했다. 범죄자들의 삶을 조명하며 정부·법원·언론 등 사회 권력이야말로 진정한 병폐라고 주장했다. 노동계급은 환호했다. 윌리엄 에인즈워스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은 소설을 몇 쇄씩 찍어내면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평단에서도 뉴게이트 소설은 중심에 있었다. 물론 진영 논리에 따라 평은 갈렸다. ‘악마적’이라는 비난도, ‘수작’이라는 극찬도 나왔다. 그런데 1840년대 후반, 이 ‘핫한’ 장르는 통째로 소멸한다. 지배 권력의 방해 때문이다. 인기 뉴게이트 소설들은 하루아침에 절판되고, 연극 무대에 올리는 게 금지됐다. 뉴게이트 소설가들은 사교클럽에서 쫓겨났다. 당시 사교클럽은 ‘문단’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AP Photo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위)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이 제거된 인물을 창조했다.
대중적 인기가 식어서는 아닌가?

그렇지 않다. 장르가 고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뉴게이트 소설은 잘 팔렸다. 문맹 비율이 높았던 노동계급은 특히 연극화된 뉴게이트 소설에 열광했다. 가령 에인즈워스의 〈잭 셰퍼드〉는 ‘셰퍼드주의(Sheppardism)’라 불릴 만한 인기를 누렸다. 연극에 들어간 노래가 에든버러 대성당 종소리로 울려 퍼지고, 작중 배경은 해외에서도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심지어 접시에도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려졌다. 184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에인즈워스의 명성이 찰스 디킨스보다 높았다. 하지만 지배 권력의 탄압 이후 대표적 뉴게이트 소설들은 거짓말처럼 사멸한다. 지금도 원본이 거의 남지 않아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대신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등 개량주의적 작품이 뉴게이트 장르의 정전처럼 취급된다. 현대 한국에 대입하자면 독립영화 몇 개를 상영 금지한 수준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한류 전체를 뿌리 뽑은 셈이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뉴게이트 소설에 노동계급이 열광하자 지배 권력층이 그만큼이나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다.

추리소설도 탄압을 받았나?

아니다. 오히려 독려받았다. 〈셜록 홈스〉 시리즈 집필자인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등을 남긴 애거사 크리스티는 작위를 받았다. 뉴게이트 소설과는 범죄를 보는 시각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사회구조를 긍정한다. ‘불순물’인 범죄만 제거하면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본다. 그래서 뉴게이트 소설과 달리 추리소설은 범죄자가 아니라 ‘사회를 다시 정화하는’ 탐정에게 독자를 이입시킨다. 상류계급 출신에 말끔한 외모를 갖춘 데다 문화 자산과 첨단 기술까지 활용하는 탐정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처럼 매력적이다. 반면 범죄자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뉴게이트 소설 속 ‘사연 있는’ 범인들과 달리, 추리소설의 범인은 평면적인 악한이다. 작가가 발언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추리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에서는 범인이 아예 오랑우탄이다. ‘짐승 같은 인간’도 아닌 실제 짐승이 범인인데, 범죄자에 대해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나(웃음). 태생부터 추리소설은 보수적 장르였다.

추리소설의 대표 격인 〈셜록 홈스〉는 어떤가?

〈셜록 홈스〉는 당대 영국 상류층의 시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모르그 가의 살인〉이 그랬듯 〈셜록 홈스〉 시리즈 대부분에서도 범죄자의 발언권은 차단된다. 홈스가 사건을 완전히 해결할 때까지 독자는 범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탈정치’ 역시 〈셜록 홈스〉의 주된 키워드다. 〈주홍색 연구〉에서 왓슨은, 홈스가 해부학·화학· 법학·선정소설 등 대부분의 분야에 박식하지만 “유독 정치학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평가한다. 경찰이 무능한 집단으로 묘사되는 이유도 재밌다. 영국 상류층은 19세기 초·중반 도입된 근대적 경찰제도를 혐오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독점하던 사적 권력이, 주로 하류층 출신인 경찰 집단의 공권력으로 대체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셜록 홈스〉뿐만 아니라 이 시기 나온 대부분의 영국 추리소설에서 경찰은 실패한다. 이유를 살펴보면 사건을 의뢰하는 상류층이 경찰에는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는 점이 한몫한다. 이들은 계급 성분이 맞는 사설탐정에게만 협조적이다.

부제를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라고 달았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이라는 반례가 있지 않나?

여성 탐정을 내세운 추리소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 탐정들은 타협을 택해야 했다. 미스 마플은 할머니로, 여성성이 제거된 인물이다. 미스 마플과 같은 ‘할머니 탐정’이나 ‘노처녀 탐정’ 등 당대 젠더 이데올로기의 바깥에 있는 여성만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젊은 여성 탐정들은 ‘콧수염이 났다’는 식의 남성적 외양이거나, 동료 남성들에게 순종적인 태도로 수사에 임했다. 안나 캐서린 그린 같은 여성 추리소설 작가들은 ‘여성 참정권에 반대한다’는 기고도 했다. 그럼에도 여성이 쓰거나 여성 탐정을 내세운 작품 대다수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추리소설이 저평가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뉴게이트 소설과는 다른 이유였다. 20세기 들어 지배적 사조가 된 모더니즘의 비토를 받았다. 모더니스트들이 중시하는 실험적·전위적· 예술적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50가지 공식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형화된 틀이 있다. 물론 이는 추리소설뿐 아니라 〈데이비드 코퍼필드〉 등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이기에 유효한 비판이라고 볼 수 없다. 추리소설이 재평가된 계기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푸코는 권력이 대중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범죄문학을 활용했다고 봤다. 대중은 범죄문학을 읽으며 계급· 인종·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을 수용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팜므 파탈’에 주목했다.

추리소설 속 여성들과 달리, 팜므 파탈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을 이용한다. 그래서 영화계의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팜므 파탈이 젠더 해방을 보여주는 전위적 캐릭터라고 본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팜므 파탈 캐릭터들은 젠더 평등이나 성적 욕구가 아니라 경제적 욕망을 좇는다. 가령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에서 팜므 파탈 캐릭터는 사무실 서류더미 앞에서 비즈니스를 고민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또한 팜므 파탈은 주로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많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팜므 파탈은 ‘흡혈귀’처럼 묘사되며, 끝내 살해당하거나 종신형에 처해진다. 자본가에 대한 증오가 팜므 파탈을 향했다고 봐야 한다. 대공황 직후 미국 대중의 분노는 정치·경제 권력 대신 여성을 향하게 된다. ‘헬 아메리카’에서 정권이나 자본가를 몰아내는 대신, 만만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결과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

21세기 범죄소설은 어떤가?

범죄소설은 당대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대중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현대 범죄소설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가치와 타협한다. 물론 기본적인 틀을 흔들기는 어렵다. 범인은 주로 유색인종이며, 9·11 테러 이후에는 무슬림이 대부분이다. 대중성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IS(이슬람국가)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는 이야기가 영미권 시장에서 어떻게 먹히겠는가? 영국 고전 추리소설에서도 인도 출신 범죄자가 다수였고, 가장 악독한 범죄는 동성애자가 저질렀다. 대신 21세기 범죄문학은 탐정 캐릭터를 변주하며 시대에 협상을 걸어온다. ‘이상적 남성의 전형’이 아니라 유색인종·여성·성 소수자를 탐정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올바름을 일부 수용하는 것이다. 과거 200여 년간 그랬듯 앞으로도 범죄소설은 계급·인종·젠더 등 사회 주요 의제가 경합하는 장이 될 것이다. 영상 매체로 터를 옮기더라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가벼운 오락물로만 치부하기에 이 장르는 너무도 복잡다단한 사회적 의미를 품고 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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