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6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 프로보노지원센터에 변호사 70여 명이 모였다. 강의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이들이 귀를 기울인 주제는 ‘아동 학대’. 한 달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프로보노지원센터는 〈아동 학대 사건 법률지원 매뉴얼〉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했다. 학대 피해 아동에게 변호사가 제공해줄 수 있는 법적·행정적 지원제도와 절차를 상세히 정리해놓은 자료다.

매뉴얼 제작을 주도한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는데 배부가 시작되자마자 동이 났다”라고 말했다. 첫 500부에 이어 추가로 500부를 더 찍었는데도 모자라 최근 300부를 더 찍었다. 변호사들조차 아동 학대 피해자 지원에 관한 ‘정리된’ 정보에 목말라 있었다.

집필진은 아동 학대 사건에 경험이 많은 변호사 9명이다(강정은·김영미·김영주·김예원·김희진·신수경·유재원·이현주·이혜선). 이들이 스스로 우물을 판 이유는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고 참고할 만한 매뉴얼이 없어서 아동 학대 사건을 맡을 때마다 매번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집필진 가운데 1월26일 강연에 나선 김영미·김영주·신수경 변호사를 만났다.


ⓒ시사IN 이명익〈아동 학대 사건 법률지원 매뉴얼〉 제작에 참여한 신수경·김영미·김영주 변호사(왼쪽부터).
아동 학대 사건은 타 사건과 어떻게 다른가?

김영주:일하면서 마음이 많이 무너진다. 가해자인 부모에게서 아이를 격리해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면서도 앞으로 이 아이가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엄마를 보고 싶어 하면 어찌할 것인지, 법률 지식만 갖고선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다.

신수경:아동 학대 사건은 한마디로, 끝이 안 난다. 보통 사건은 판결이 나면 변호사로서 할 일이 끝난다. 아동 학대 사건은 이후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때 그 시설에 보낸 판단이 맞았는지 끊임없이 신경이 쓰이고 또 개입이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시스템이 없으니 변호사들끼리도 사적으로 만나 “너는 그런 경우 어떻게 했니” “난 어떻게 할까” 답답한 마음에 조언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영미: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아이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가해자와 분리돼 보호시설에서 지냈는데 올해 그 아이가 만 18세가 되면서 머물 곳이 없어졌다(민법상 성년은 만 19세이지만 아동복지법상 보호 대상 아동의 연령은 만 18세 미만까지이다). 국선 변호를 끝낸 지 오래 전인 사건이지만 나 말고는 마땅히 아이를 도울 사람이 없어서 구제 절차를 알아봐줬다. 이처럼 아이가 시설로 간 뒤 잘 지내지 못하고 다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김영주
:아동 학대 피해자가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폭력성이 내재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다. 아동 학대에서 생존했다 해도 목숨만 살아남았지 치료가 안 된 거다. 전문병원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치료해봐야 겉에 난 상처만 덮어주고 나머지는 잊고 지내고 견디라는 수준이다.

ⓒ시사IN 윤무영서울지방변호사회 프로보노지원센터에서 제작한 〈아동 학대 사건 법률지원 매뉴얼〉.
아동 학대 관련 인프라가 실제로 많이 부족한가?

신수경: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특히나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 처우가 엉망이다. 월급은 적고 일이 고되니 인사이동, 휴직, 퇴사가 매우 잦다. 사건과 관련해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연락하면 담당 직원이 퇴사했다거나 새로 온 지 두세 달밖에 안 됐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사례를 적어도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계속 바뀌니 사후 관리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김영주:돈이 아예 없다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집행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각 정부 기관에 아동 학대 예산이 조금씩은 다 있다. 어떤 아이는 여기저기에서 다 받고 어떤 아이는 하나도 받지 못한다. 피해자들이 정보를 모르니 신청하지 못해서 예산이 남는 경우도 많다. 우리도 이번에 매뉴얼을 만들면서 이런 지원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피해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지금 있는 법과 예산만으로도 효율적으로 하면 이렇게까지 엉망일 수 없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원 체계를 하나로 잘 정리하고 그에 따라 돈도 효율적으로 지급하면 좋겠다.

김영미:아동 학대 관계기관끼리 커뮤니케이션도 잘 되지 않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아동보호전문기관대로, 구청은 구청대로 다 각각 관리하니 시너지가 안 난다. 얼마 전 한 학대 피해 아이 같은 경우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과 구청 직원이 밥 먹는 자리에서 우연히 정보를 공유하게 돼 겨우 지원이 연계되기도 했다.

신수경:주로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예산 부족이 많이 지적되는데,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도 하고 또 이곳에 많은 일을 시키는 측면도 있다. 아동보호전문기관 외에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시·군·구청 등 수많은 아동 학대 관련 기관이 있는데 한 곳이 허브, 그러니까 컨트롤타워가 돼서 업무를 잘 분장해줬으면 좋겠다.

김영주:무작정 아동보호전문기관 예산만 늘면 직원들은 짜증 낼 수도 있다(웃음). 일만 늘어나니까. 돈은 인건비에서 늘리고, 정책은 우후죽순 벌이기보다는 기존 것을 정리해야 한다. 정부에서 틀어쥐고 가르마를 지어주면 좋겠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 안에 아동 학대만 담당하는 국이 하나 생기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신수경:아동 학대 인력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키워주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한 것 같다.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들의 전문성도 물론이거니와, 보건복지부 안에서도 아동 학대 담당 공무원의 역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이나 쉼터 등의 복지 ‘시설’ 관리 업무 정도로 생각하더라. 절대로 쉽게 생각할 업무가 아닌데도.

아동 학대 가해자 처벌 강화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영주:최근 검찰이 고준희양 사건의 가해 부모에 대해 법정 최고형(아동학대치사의 경우 무기징역)을 구형하겠다고 밝혔다. 서현이 사건 등 다른 아동 학대 사건에 대해 검찰이 법 적용을 가볍게 한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전향적인 태도다. 처벌 강화는 좋다. 그런데 그런다고 아동 학대가 사라질까? 가해자를 욕하는 걸로 그치면 달라지는 게 없다. 아동 학대 예방과 사후 지원에서 뭐라도 바꿔가는 게 중요하다. 준희양 부모를 악마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자기 자녀에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할 필요도 있다. ‘훈육 차원의 체벌은 괜찮다’ ‘아이는 때려서 가르쳐야 된다’는 인식이 바로잡히는 데까지는 아직 멀었다.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권리의 주체로 보는 사회 분위기가 아동 학대 예방에 매우 중요하다.

김영미:잔인한 아동 학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현장검증에 구경 나와서 욕하고 울고 그런다. 그런데 정작 아이가 죽기 전에 그 이웃들은 뭘 하고 있었나? 부모뿐 아니라 주변 이웃을 포함한 모든 어른들도 무관심에서 깨어나야 한다.

김영주:원영이 사건 같은 경우 아이가 락스를 뒤집어쓴 채 방치된 목욕탕은 방음도 잘 되지 않고 이웃집과도 아주 가까웠다. 아이가 거기에서 맞고 죽어가면서 소리 한 번을 안 냈겠나? 그냥 ‘옆집 애가 혼나나 보다’ 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 여기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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