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충남 아산시의 한 아파트에서 한 여성이 몸을 던졌다. 서른다섯 살 박 아무개씨. 세 살 난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2006년 해고된 KTX 여승무원이었다. 박씨와 동료들은 1·2심 재판에 이겨서 받지 못했던 임금을 받았고 복직할 날만 기다리던 중이었다. 박씨가 투신하기 얼마 전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5년 2월26일 대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1·2심 판결과 달리 KTX 여승무원이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고 했다. 여승무원들이 지난 4년간 코레일에 고용된 것으로 인정돼 받은 임금 1인당 8640만원이 빚으로 돌아왔다. 숨진 박씨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했다고 알려졌다.

2015년 11월 여승무원들이 최종 패소하자 코레일은 채권자가 되어 여승무원들을 압박했다. 2016년 4월과 5월 코레일은 지난 4년간 여승무원들이 지급받은 임금이 부당이득이니 반환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연 5%의 지연손해금이 붙는다고 적혀 있었다. 2017년 1월 대전지방법원이 임금 반환을 독촉하는 지급명령서를 여승무원들에게 보냈다. 지급명령일로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5%의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했다. 한 달에 108만원이다. 지연손해금을 합해 여승무원 1인당 빚이 1억원이 넘어갔다. 본안 소송으로 넘어가면 강제집행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시사IN 신선영1월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1층 대합실에서 KTX 여승무원들이 108배를 하고 있다.
반환 소송을 맡은 대전지방법원(조정전담법관 정우정)은 바로 본안 소송으로 넘어가는 대신 원만히 합의하라며 조정 기간을 부여했다. 2017년 3월 1차 조정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해 결렬되었다. 이후 조정 기일은 6월, 9월, 10월로 계속 미뤄졌다. 조정 도중인 2017년 7월28일 홍순만 코레일 사장이 사의를 표하면서 시간이 더 걸렸다. 해를 넘긴 2018년 1월16일 마침내 열린 조정 기일에서 재판부는 △해고된 여승무원들은 원금의 5%(1인당 432만원)를 3월 말까지 지급하고 △노조는 국제노동기구(ILO) 등 유엔 산하 국제기구와 유럽의회에 코레일을 제소하는 활동과 코레일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포기하며 △코레일은 나머지 청구를 포기하는 내용으로 조정 권고를 결정했다.

이 같은 조정은 개신교, 불교, 성공회, 천주교 등 4대 종단이 마련한 중재안을 재판부가 받아들이면서 이뤄졌다. 종교계는 2017년 5월 꾸려진 ‘KTX 해고 승무원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에 참여하며 중재에 적극 나섰다. 대책위 공동대표이자 종교계 중재 실무에 관여한 정수용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는 “코레일은 자신들이 승소해 받을 수 있는 돈을 포기하면 배임이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해고 승무원들의 고통이 해를 넘길 상황에서 ‘10대0’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봤다. 비영리단체 주빌리은행이 오래된 부실채권을 원금의 3~5%에 사들여 채무자를 구제한 선례에 착안해 상징적 금액을 제시했다. 재판부가 당사자 간 조정 시간을 벌어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코레일은 이사회를 열어 중재안 수용을 결정했다. 여승무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1월31일부로 조정이 성립되었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1·2심 판결로 받은 임금을 반환하는 것이 대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의미가 될 수 있어서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라고 말했다. 2015년 대법원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와 여승무원의 업무가 각각 안전업무와 고객서비스 업무로 구분되며, 여승무원은 이례적인 상황에만 안전업무를 하기에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이 판결을 그해 최악의 판결로 선정했다. 그럼에도 조정을 받아들인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김승하 지부장은 “법원 직원이 찾아올까 봐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놀라는 등 여승무원과 그 가족이 빚 문제로 겪는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종교계가 나선 상황에서 명분만 고집하기도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김승하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장(가운데)은 “안전을 담당하는 승무원으로 제대로 고용하라”고 말했다.
빚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여승무원들의 주장이다. 대책위는 환수금 문제 해결뿐 아니라 KTX 승무업무 직접고용과 해고 승무원 복직을 요구했다. 김승하 지부장은 “12년 세월 동안 ‘떼를 쓴’ 게 아니라 안전을 담당하는 승무원으로 제대로 고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또한 코레일이 애초 약속했던 직접고용 전환을 이행하라는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다”라고 말했다. 2006년 해고된 KTX 1기 승무원 정미정씨는 “대법원 판결 이후 3년이 거꾸로 간 시간이었다면 이제 다시 원점에 섰다고 본다.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감사한 마음이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비춰질까 봐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생명·안전 업무 직접고용’ 움직임은 12년 전 안전을 담당하는 승무원을 직접고용하라는 KTX 승무원들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 2017년 7월 고용노동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생명·안전과 밀접한 상시·지속 업무는 직접고용 정규직화가 원칙”이라고 천명했다. 지난해 9월부터 코레일 노·사·전문가협의회가 정규직 전환 대상 업무를 논의해오고 있지만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는 상태다. 코레일은 생명·안전 업무 범위를 열차승무 업무 등을 제외한 차량 정비, 선로 보수 등으로 보고 간접고용 인력 9187명 중 1337명만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무엇보다 가이드라인은 자회사를 포함한 공공기관에 위탁 또는 용역을 주는 경우를 정규직 전환 예외 사유로 두고 있다. 현직 KTX 승무원들은 코레일에게 승객 서비스를 위탁받은 기타 공공기관인 자회사 코레일관광개발 소속이다. 전환 예외 사유에 해당되는 셈이다. 코레일은 자회사 소속 정규직이나 파견·용역 노동자의 모회사 소속 전환과 관련해 고용노동부에 질의했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코레일에 ‘자회사 소속 정규직을 모회사로 전환하는 것은 정규직 전환의 문제가 아닌 공공기관 간 기능(정원) 조정의 문제’라는 내용의 회신 공문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다만 생명·안전 업무로서 동일한 업무를 모회사인 철도공사와 자회사가 분리하여 담당하는 것은 향후 조직운영이나 인력관리상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기획재정부·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 공공기관노사관계과 관계자는 “고용노동부 소관은 넘어서지만, 해당 경우는 누가 봐도 바람직하지 않다. 코레일이 자회사 소속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취지에서 보낸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승무원은 안전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코레일의 자회사 5곳은 업무가 생명·안전과 깊이 연관돼 있고 처우 등에서 사실상 용역처럼 운영된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왔다. 코레일은 KTX 승무원 문제가 불거진 이후 “(자회사 소속) 승무원들의 업무는 안전과 거의 무관하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2013년 대구역 열차 추돌 사고 때 코레일관광개발 승무원이 승객들을 대피시킨 이후 코레일관광개발은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만이 아니라) 자사 승무원도 안전업무를 사실상 담당하도록 비상 매뉴얼을 개정했다. 2015년 개정된 철도안전법은 철도 사고가 나면 해당 차량의 운전업무 종사자와 여객승무원이 철도 사고 현장을 이탈해선 안 되며, 이를 어겨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철도차량·시설이 파손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대법원 판결도 자회사 승무원이 안전을 담당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런데도 ‘공식적으로는’ 자회사 승무원이 안전을 담당하지 않고 이례 상황 시 ‘협조’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간접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코레일 열차팀장과 자회사 승무원은 현재도 합동 훈련을 주기적·의무적으로 하지 못한다. 권두섭 변호사는 “정부 가이드라인이 생명·안전 업무는 직접고용하라고 한 만큼, 현재 (노·사·전문가협의회) 논의에서 현직 승무원의 코레일 직접고용이 결정되고 그 과정에서 해고된 분들도 같이 복직되는 것이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철도노조의 어깨가 무겁다”라고 말했다. 노·사·전문가협의회에 참여하는 김영준 철도노조 비정규조직국장은 “코레일관광개발 소속 승무원들이 직접고용되면 향후 노사 교섭을 통해 해고 승무원들도 직접고용 형태로 복직하는 방향으로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용역계약 기간을 고려해 늦어도 3월 안에는 협의가 끝나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월 중 결정되는 코레일 신임 사장의 의지가 중요한 변수로 보인다.

2004년 출범할 때부터 이뤄진 KTX 승무원 외주화는 공공부문 외주화의 신호탄이었다. 외주화하면서 채용 대상을 별다른 근거 없이 여성으로 한정했다. 자회사를 바꿔 계약직으로 쓰다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니 280여 명을 해고했다. 1월25일 해고된 KTX 승무원들이 108배를 올리는 자리에는 현직 승무원들이 함께했다. 정수용 신부는 “비정규직·여성 노동, 안전 등 KTX 여승무원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이 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사람을 쓰고 버리는 문화’가 지속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많은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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