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20세기 전반기에 그들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자기 인식부터 반드시 살펴야 한다. 그러기 전에 이성환의 〈전쟁국가 일본〉 (살림, 2005)에 나오는 한 대목부터 명심하자.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전쟁으로써 전쟁을 부양하듯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하면서 성장해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군사력을 통한 국가 발전은 일본의 국시(國是)와 같은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벌인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해 대만(타이완)을 할양받았다. 타이완이 일본 영토가 된 것은 아시아에 속한 나라가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최초의 사례이자,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에서 식민지 제국이 되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남은 마지막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함으로써 타이완에 이은 두 번째 식민지를 획득할 발판을 만들었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과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자 한반도 각지에서 대대적인 항일 무장투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군대를 증강하여 진압에 성공한 1909년까지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일본은 1910년 8월 대한제국 병합을 완료했다.

ⓒ이지영 그림

1914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의 중국 조차지인 칭다오와 태평양의 독일령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했다. 이후 표면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군사 대국화를 모색한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했고,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위한 중일전쟁(1937)을 벌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38년 3월,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듬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나치는 1940년 4~6월 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 룩셈부르크·프랑스를 차례로 점령하고, 8월부터 영국 본토 공습에 나섰다.

독일의 선전으로 동남아시아에 공백이 생기자 1940년 6월, 일본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남진 정책을 피력한다. “동아(東亞)의 각국과 남양(南洋) 각 지방은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또 경제적으로도 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고, 나아가 상부상조,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공존공영의 열매를 거둠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킬 자연의 운명을 지녔습니다.” 이때 일본 정부는 기본 국책으로 ‘대동아의 신질서’를 처음으로 언급했고, 이 딱딱한 어감의 용어는 그해 7월에 새로 취임한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에 의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듣기 좋은 용어로 세탁되었다.

전세 관망을 마친 일본은 남진을 국책으로 삼았던 그해 9월27일,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편을 먹는 삼국동맹에 조인했다. 이는 동아시아와 남양에서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와 일전을 치르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조인을 맺기 4일 전에, 미국이 장제스를 원조하는 인도차이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령 베트남 북부에 무력 진출했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대동아 공영권’을 인정받으려고 했으나 남진에 자극받은 미국은 대일 석유 수출 금지로 대응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A(미국=America)·B(영국=Britain)·C(중국=China)·D(네덜란드=Dutch) 포위진’에 봉쇄당했다는 위기의식을 주입하면서 미국과의 개전을 준비했고, 1941년 12월7일 미국 태평양 함대 기항지인 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 기지를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이정선 옮김, 와이즈플랜 펴냄
이상은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의 아시아 침략〉(와이즈플랜, 2018)을 요약한 것인데, 정작 지은이는 “일본은 20세기 전반부 50년 동안을 전쟁으로 시종일관”했다는 더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책을 요약해버린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짓밟고 그 나라를 종속시키는 것을 ‘침략’이라 정의하고 그 반대를 ‘해방’이라고 한다면, 그간의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한다.

사죄하지 않아도 무방하게 된 일본

하지만 일본에는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세력과 논리도 꽤나 무성하다. 이들은 특히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영미(英美)와 서구 제국주의자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호도하는 데 주력한다.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하야시 후사오가 1964년에 주장한 ‘대동아전쟁 긍정론’이다. “일본의 참패로 끝난 이 전쟁을 ‘범죄적인 침략전쟁’으로 정리해버리는 것은 도쿄재판(연합군이 일본의 전쟁 범죄자를 심판하기 위해 1946년 도쿄에서 행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검사 측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대동아전쟁의 형태가 침략전쟁으로 보였더라도 본질은 해방전쟁이었다.”

대동아전쟁 긍정론이 일본의 극우·보수주의 진영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아시아 국가가 서구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세계사적 역설에 기인한다. 와카미야 요시부미의 〈화해와 내셔널리즘〉(나남, 2007)은, 바로 이 역설로 인해 일본인들이 “아시아를 위한 싸움이라는 픽션”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미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각국이 전후 차례대로 독립을 이룩한 것이 ‘일본의 전쟁 목적이 완수되었다’라는 식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본 우익 정객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것을 두고도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는 이겼다”라고 자위한다지만, 일본에 침략을 당했던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해방되었다고 말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대동아전쟁 긍정론의 허구다.

다나카 히로시 외 다섯 명의 일본 학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기억과 망각-독일과 일본, 그 두 개의 전후〉(삼인, 2000)는 정반대의 길을 간 독일과 일본의 전쟁 책임 처리 과정을 분석한다. 이 책은 일본이 왜 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매우 다양한 원인을 제시한다. 경청할 분석이 많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 긴요하다. 일본이 대동아전쟁 긍정론과 같은 궤변에 허우적거리게 된 최종심급 원인은 일왕 히로히토가 소추되거나 퇴위하지 않은 데다가, 천황제가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틀러가 연합군에게 체포되고도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은 것과 같다. 이로써 일본은 전쟁과 식민 지배를 사죄하지 않아도 무방한 나라가 되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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