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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을 사찰했다. 재판에 관여하려 했다. 양승태 대법원(2011~2017년)의 법원행정처가 저지른 일이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 고스란히 이런 내용이 드러났다. 법관의 독립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라고 나와 있다.

1월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지난해 3월부터 불거진 ‘사법부 블랙리스트 논란’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크게 네 가지다. 인사모(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 및 공동학술대회 관련 카카오톡방 개설·뒤풀이 자리 등 사찰, 판사회의 동향 및 사법행정위원회 추천 후보자 리스트 적·청·흑 색깔별 분류, 법관 개인 페이스북 및 비공개 카페 댓글 등 사찰,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원세훈) 재판 개입 정황 등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왼쪽 사진) 시절인 2011년 11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법원행정처 컴퓨터를 조사한 결과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은, 문자 그대로 ‘블랙리스트’가 나오지 않았다며, 김명수 대법원장이 전임 양승태 대법원을 무리하게 뒤흔든다고 공격했다. ‘법란’이라는 격한 용어도 사용했다. 조사 대상이 된 법원행정처 일부 판사들도 해당 문건이 ‘통상 업무’라고 주장하며 조사 결과에 반발하는 기류도 보였다.

사건의 본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블랙리스트는 있었나 없었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질서 유린 사건인가, 김명수 대법원의 정권 코드 맞추기인가?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밝힌 37쪽 분량의 조사보고서(이하 추가조사위 보고서)와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55쪽 분량의 별지 전문(이하 사찰 보고서)을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민중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위원장을 맡고 현직 판사들이 참여했다. 지난해 11월20일부터 1월22일까지 조사했다.

법원행정처는 최고 엘리트 법관의 승진 코스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만든 사찰 보고서에는 최고 엘리트 법관들이 썼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과 표현이 쏟아진다. 익명 법관 카페에 ‘회원으로 가장해 카페 내 활동 중단 글을 게시’하라고 제안한다. ‘와해’ ‘유도’ ‘엄포용 카드’ ‘거점 법관’ ‘핵심 세력’과 같이 공작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표현도 곳곳에 등장한다. 사찰 보고서의 핵심 대목을 발췌해 날것 그대로 싣는다.

■ 원세훈 재판 개입 정황(사찰 보고서 ①)

 

이번에 공개된 양승태 대법원의 사찰 보고서 가운데 가장 핵심이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 2심 선고 바로 다음 날인 2015년 2월10일 작성됐다.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청와대가 주고받은 재판 정보가 담겼다.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을 파악했는데, ‘BH(청와대)’를 첫 번째로 올렸다. 법원이 청와대 동향을 살폈다는 자체도 문제지만, 내용을 보면 더 심각하다. 청와대가 선고 전에 전망을 법원행정처에 물었다. ‘항소 기각’이라는 청와대의 기대도 전달했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우회·간접적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살피고 있다”라고 청와대에 알렸다. “1심과 달리 결과 예측이 어려워 행정처도 불안해한다”라며 자신들도 애쓰고 있다고 어필했다. 1심 결과는 법원행정처가 미리 알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문장이다. 1심 이범균(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무죄·국정원법 유죄’라고 판단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논란을 차단해줬다. 반면 2심 김상환(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도 유죄로 판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법정 구속했다(국정원 댓글사건 핵심증거의 처음과 끝 기사 참조).

양승태 대법원의 사찰 보고서에 ‘선고 후 동향’이라는 항목도 있다.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의견을 담았다. 우 수석이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대법원으로 넘어온 사건은 우선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심리한다. 소부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기존 판례를 변경해야 할 경우 13명 대법관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배당한다. 우 수석이 언급한 전원합의체 회부는 사실상 2심 결과가 뒤집히기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법원행정처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입장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을 두고 법원행정처는 ‘정무적 대응 방향을 검토’하라는 표현도 썼다. 이어지는 정무적 판단은 이렇다. “상고심이 남아 있고 BH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는 국면→발상을 전환하면 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음.”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하는 방안 검토 가능.”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에 힘을 쏟았다. 박근혜 정권이 애가 타는 상황에서 원세훈 재판 결과를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과 ‘바꿔 먹기’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법원행정처의 업무 영역은 사법행정이다. 정무적 판단은 업무 영역에 들어가 있지 않다.

당시 2심 선고 결과에 대한 일선 판사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법원행정처는 호평이 담긴 판사 익명 게시판 댓글도 수집했다. “징역 3년 법정 구속… 속이 시~원하다!!” “꼭 내가 형사피해자이고 가해자한테 실형 선고된 것 같은 기분예요.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이건 애교 섞인 과장임^^” “제가 오늘 아침에 너무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정말 그게 다 잊혀지고 막 기분이 좋아져요!”

■ 온라인 익명 게시판 사찰(사찰 보고서 ②)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익명으로 된 인터넷 게시판도 사찰했다. 2014년 만들어진 ‘이판사판야단법석’ 다음 카페는 현직 판사만 가입할 수 있는 비공개 커뮤니티였다. 당시 카페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적극 추진하는 상고법원에 대해 다른 목소리가 나왔고, 그가 지명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부정 평가가 있었다(당시 박 후보자는 1987년 박종철 수사팀 검사로 사건을 은폐·축소했다는 비판을 샀다). 법원행정처는 이를 ‘문제 소지가 있는 글과 댓글’로 판단했다. “상고법원은 자칫 잘못하면 또 하나의 대법원이 되어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박상옥) 낙마에 한 표요” “이분이 대법관이 되신다면 같은 법관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질 것 같아요” “전임(신영철)과 후임(박상옥)이…”.

법원행정처는 카페 폐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처 방안도 제시한다. 자발적 조치로는 “회원으로 가장해 카페 내 활동 중단에 대한 글을 게시하는 방법” 등이 꼽혔다. 실제 로그인 가능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확보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국정원 댓글부대인 양 신분을 가장해 글을 쓰겠다는 방식이다. 운영자의 자진 폐쇄를 유도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세심한 대책도 잊지 않는다. 운영자의 믿을 만한 선배 여성 법관 등을 통해 우려를 전하되, 해당 판사를 운영자로 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런 방식으로 카페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강제 조치도 검토한다.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권고의견 제5호, 제7호 위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최후의 설득 및 엄포용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는 전략이 사찰 보고서에 담겼다.

■ 법관 개인 페이스북 등 사찰(사찰 보고서 ③)

차성안 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과 〈시사IN〉에 기고한 글로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글 내용 요약은 물론이고 판사들 반응까지 네 가지 부류로 나눴다. 이에 해당하는 판사 이름까지 파악해 적시했다.

차 판사가 〈시사IN〉에 기고한 글(제418호 ‘판사의 일주일을 공개합니다’ 기사 참조)에 대해서는, 기사를 공유한 개인 페이스북 댓글까지도 사찰했다. 해당 기고문에는 사실심을 강화해 항소·상고를 줄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판사가 겪는 ‘5분 재판’ 현실을 담았다. 상고법원 논의에 앞서 1·2심을 강화해 소송 불복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 기고문이 나간 다음 자신의 페이스북에 “의제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라는 댓글을 남겼는데 이 댓글도 사찰 보고서에 담겼다.

심지어 차 판사가 글을 올리게 된 경위에 지극히 사적인 사연도 곁들여 써놓았다. 이메일에 쓴 가족사나 해외 연수 경험 등을 발췌해 보고서에 실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차 판사의 사촌인 현직 부장판사를 동원해 설득하는 전략을 세웠다. “각 2시간 정도씩 2회에 걸쳐 통화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라고 쓰는 등 시도가 실패한 내용도 사찰 보고서에 상세히 남겼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과거 차 판사의 대학 시절 활동까지 뒤졌다. 학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이력을 놓고 ‘非主流(비주류) 활동가 성향’이라고 평가한다. 대응을 위해 차 판사의 상사인 지원장에게 “일반적인 주의 사항을 격려 내지는 덕담 형식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안내도 쓰여 있다. 또한 “차성안 판사가 존경하는 선배, 친한 선후배 명단 취합 관리 필요”하다는 사후 관리 방안도 제안한다.

■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 사찰(사찰 보고서 ④)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2015년 사법행정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사법행정위원회에 참여할 판사를 판사회의에서 뽑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내부 대응 문건을 만들었다. 추천권자인 고등법원장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판사 64명이 리스트에 오른다.

문제는 사찰 보고서에 담긴 리스트의 내용이다. 이름과 프로필 정도가 아닌 “强性(강성)” 딱지가 몇몇 법관에게 붙어 있다. ‘강성’의 기준은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 내역이 있는 법관 옆에는 관련 설명도 있다. “전략적 사고에 능하나, 주장이 강경한 편은 아님” “부장 된 후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평가” “우리법연구회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나, 온건한 편”과 같은 내용과 함께 적색 1순위, 청색 2순위, 흑색 3순위라고 표시됐다. 법관 중 누구와 가까운지, 가족 법조인은 누군지도 적혀 있다.

이 리스트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지시를 받고 썼다. 작성 후에는 기획조정실장과 임종헌 차장에게 보고됐다. 이에 대해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합리적 기준도 없는 정치 성향 분류 등은 부정적 이미지를 낙인찍을 우려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37쪽 분량 조사보고서에서 “법관들의 동향과 여론 등 비공식 정보 수집은 법원 사찰과 재판 개입의 비판을 받을 우려가 크다”라고 밝혔다. 이어 추가조사위원회는 이렇게 썼다. “법관이 사법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법행정 담당자가 법관 자료를 폭넓게 수집했다면, 인사상의 불이익 조치 여부를 떠나 작성만으로 법관의 독립에 부정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음(추가조사위 보고서 35쪽)” “법원행정처가 외부 기관(박근혜 청와대)과 특정 재판(원세훈 재판)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외부 기관 문의에 따라 담당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알려주려 했다는 부분은, 재판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거나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도 있음(추가조사위 보고서 37쪽).”

ⓒ연합뉴스2016년 10월18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이전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자들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판사의 재판 지원 등 ‘보급부대’ 격인 법원행정처 업무에 사찰이 왜 들어가느냐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판사는 이용훈 대법원(2005~ 2011년) 시절을 예로 들었다.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 재판 배당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터져서 판사들이 법원 내부 통신망에 비판 의견 표명을 많이 했다. 그때 이용훈 대법원장은 오히려 관련 자료를 만들지 말고 인사기록 카드에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 서울 지역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너무 쪽팔린다. 저 정도 문건이 나왔는데 어떻게 법원행정처의 통상 업무라고 핑계를 대냐. 그 말을 하는 판사들도 재판에서 같은 주장을 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온 문건도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 중 키워드 검색(‘성향’ ‘동향’ 키워드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 이름 등)으로 찾아낸 일부가 나왔을 뿐이다. 키워드 검색으로 문건이 발견됐어도 비밀번호가 설정돼 확인하지 못한 파일이 760건이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의 컴퓨터는 당사자가 거부해 열어보지도 못했다. 추가 조사 의지를 밝힌 김명수 대법원장은 1월24일 양승태 대법원 시절 임명된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을 안철상 대법관으로 교체했다. 더 이상 법원 자체 조사에 맡길 게 아니라 강제 수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퇴임사에서 법관의 독립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헌법이 선언하는 법관 독립의 원칙은 법관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법관에게 특혜나 특권을 주는 것도 아니다. 법관 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제도다. 법관에게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헌법적 의무와 책임이 있을 따름이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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