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편 상식에 어긋나거나 인륜에 반하는 상황을 보면 “막장 드라마 같다”라고 빗대어 말한다. 그 세계에는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형태의 모순과 불평등과 불의가 집약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드라마가 막장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출생의 비밀, 음모와 배신, “암세포도 생명이다” 따위 상식을 벗어난 대사 등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그중 내가 눈여겨보는 조건은 사적 복수다. 막장 드라마 세계에서는 피고름으로 글을 쓰거나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서 개인이 직접 복수의 주체가 된다. 이런 사적 복수는 역설적으로 ‘공적 시스템’의 부재를 고발한다. 피해자가 사회적 돌봄과 법적 해결 등 공적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할 경우 선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공적 시스템은 뭘 하고 있을까?

지난해 국정감사 기간에 경찰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데이트 폭력으로 검거된 사람이 8367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루 평균 23명이 폭행을 당한 셈이다. 이 중 18명이 사망했고, 34명이 ‘미수’에 그쳐 살아남았다. 즉, 18명은 공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기도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말해지지 않은’ 경우를 더하고, 범주를 넓혀 가정폭력 사례까지 포함하면 많은 여성이 목숨 걸고 데이트하거나 결혼하는 셈이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여자 화장실에서 마스크를 쓴 괴한이 20대 여성을 둔기로 폭행한 뒤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정켈 그림

이 가해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얼마 전 여자 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이며, 피해자 유족이 피고인을 용서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냈다는 이유를 들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피고인은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법정에서 이런 얘기 잘 하지 않지만 피해자 유족들이 용서한 것으로 보고 특별히 당부하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유족들의 용서를 근거로 중대 범죄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이 가해자를 풀어주기 위해 ‘온 우주’가 도와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당사자도 아닌 유족들의 용서가 법적 판결의 중요한 근거라면 애써 재판은 왜 할까? “평생 속죄하며 살라”는 아무 구속력 없는 명령이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생명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이뿐 아니라 범행을 저지른 자들은, 재판부가 미래를 걱정해줘서,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술에 취했다고, 우발적이었다고 결국 ‘합법적’으로 세상에 복귀한다.

좋은 사회란 공적 시스템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사회

누군가는 “법이 원래 그렇다”라고 자조한다. 그렇다면 원래 그런 법은 언제부터 존재했나? 그 법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와 같은 판결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판례’로 쌓여 또 다른 가해자를 풀어줄 가능성이 높다. 가해자일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공적 자유를, 피해자일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불신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막장 드라마’의 서사는 복수하는 개인보다는 그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하게 만든 ‘원인’에 의해 성립되고 전개된다. 막장성이 없는 좋은 사회란, 그 원인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공적 시스템을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사회다. 그 공적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억울한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누구에게 좋은 사회이며, 그 공적 시스템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자꾸 가해자에게 ‘선처’를 남발하는 사회는 (가해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해롭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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