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군사 협력에 관한 여러 건의 협정과 MOU가 체결되었다. (…) 이들 협정에 흠결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런 부분들은 앞으로 시간을 두고 UAE (아랍에미리트) 측과 수정하거나 보완해 나가겠다. 적절한 시기가 된다면 공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1월10일 신년 기자회견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와 UAE 간 비공개 군사협정 논란에 대한 질문에 이와 같이 답했다. 전 정부가 맺은 비공개 협정에 흠결이 있다고 판단했음을 사실상 확인해준 것이다.

하루 전인 1월9일, 이명박 정부 각료였던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UAE의 유사시에 한국군이 자동 개입한다는 군사협약을 자신이 결단해 맺었다고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확인했다. 이 인터뷰에서 “한국군 자동 개입 조항은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한다”라는 질문에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답변했다. “UAE에 어려움이 생기면 돕기로 약속했다. 그렇다고 만일 UAE에 한국군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국회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다.”

ⓒ연합뉴스2012년 11월21일 UAE(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가운데)이 바라카의 원전 착공식에서 UAE 측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UAE 미스터리’의 끝이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UAE에 특사로 가는 이례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2월18일자 〈조선일보〉는 임 실장이 UAE의 원전 관련 불만을 수습하러 급히 UAE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전력공사가 총 74조원 규모의 UAE 원전 건설·운용권을 따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탈원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UAE 측이 항의했다는 것이 보도의 골자였다.

이 보도 이후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야당은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등 공세를 집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UAE의 원전 건설 공사를 수주하는 조건으로 비공개 군사협약을 맺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제 논란의 초점은 ‘탈원전 국익 손실’에서 ‘위헌적 이면 합의’로 바뀌었다.

원론 차원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군 해외 파병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헌법 제60조가 못 박고 있다. 그러므로 국회 동의 없이 정부가 파병을 약속해준 협약은 위헌 소지가 크다.

실질 차원에서는 어떨까. 같은 인터뷰에서 김 전 장관은 “UAE는 오랜 기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다. 위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적다”라고 말했다. UAE가 평화로운 나라이니 자동 참전 조항은 사실상 ‘립서비스’라는 취지로 읽힌다.

UAE의 안보 상황을 거론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걸프해를 사이에 둔 적대적 이웃 국가인 이란이다. UAE는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 국가,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을 믿는 페르시아인 국가다. UAE와 이란은 걸프해에 있는 섬 세 곳(아부무사, 대툰브, 소툰브)을 놓고 1971년 이후 47년째 영토 분쟁 중이다.

이슬람 무장 테러단체의 타깃 될 수도 있어

UAE는 2015년 이후로 이어지고 있는 예멘 내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참전 중이다. 첨단 화력은 사우디가 대지만 실제 전투는 UAE 군이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어 UAE로서도 발을 빼고 싶은 처지다. 동남쪽으로 국경을 맞댄 오만과는 역사적 악연 때문에 늘 사이가 나쁘다. 지난해 UAE는 북서쪽 이웃 국가 카타르가 테러 단체를 지원한다며 단교를 선언했다.

더욱이 UAE가 느끼는 진짜 안보 위협은 따로 있다. 왕정 국가인 UAE는 국민의 반정부 시위에 대단히 예민하다. 정통성이 있는 민주국가와 달리 왕정은 가벼운 소요만으로도 쉽게 위기에 빠지곤 한다. 2010년 튀니지의 한 소도시에서 일어난 노점상의 분신 사건은, 아랍 세계 전체를 뒤흔들고 역내의 정권들을 연쇄 전복시킨 2011년 ‘아랍의 봄’으로 폭발했다. 중동 왕가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동 전문가는 “UAE 최대의 안보 이슈는 자국민으로부터의 정권 안보다. 지금 단계에서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UAE는 국가 간 전쟁보다 오히려 국내 소요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 지원을 한국에 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동 왕정들의 이해관계에서는 그쪽이 확실한 우선순위다”라고 말했다. 국내 소요 진압 지원이라면 명분은 부족하지만 실질적 위험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전문가는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보았다. “오히려 그 가능성이 이 군사협약을 위험하게 만든다.” 무슨 뜻일까.

“만약 이 협약이 UAE 왕가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라면, 아랍의 대중에게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왕정의 편이다’라는 인식이 각인될 수 있다. 이것은 비국가 행위자들, 쉽게 말해 이슬람 세계의 무장 테러단체들에 한국을 타깃으로 인식시킬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는 이슬람 세계의 비국가 행위자들에게 한국이 최우선 타깃은 아니었다. 한국은 이슬람 테러리즘의 세계관이나 전략과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군사협약은, ‘아랍 인민을 탄압하는 왕정의 편을 드는 나라’로 한국을 각인시킬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김태영 전 장관이 “오랜 기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라고 부른 UAE는 이런 위태로운 지정학적 곡예를 부리는 나라다. 한국이 이 곡예에 얼마나 깊숙이 발을 걸쳤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이 사건이 한국의 안보에서 사소한 문제라고 치부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적절한 시기가 된다면 공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일련의 사태 전개를 보는 보수의 기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 드라이브를 걸다 섣불리 건드려서 국익을 훼손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군사협약은 종합적 국익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위험은 사소하고 이익은 극대화한 잘된 거래인데, 사소한 위험을 꼬투리잡고 있다.’ 김태영 전 장관이 인터뷰에서 이런 취지로 군사협약을 방어했다. 최종 책임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접근법도 비슷하다. 1월1일 신년 하례회에서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이야기하면 폭로여서 이야기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정신을 차리고 수습한다고 하니 잘 정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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