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3일 밤 9시, 케이블 채널 tvN에서 새 주말 드라마 〈화유기〉 첫 회가 방영됐다. 배우 오연서, 차승원, 이승기 등 스타 출연진을 내세운 신작이었다.

〈화유기〉 첫 방영 20시간 전, 경기 안성시 일죽면에 위치한 세트장에는 아직 스태프들이 남아 있었다. 외주업체 MBC아트 소속으로 소도구 세팅을 담당한 이 아무개 소품팀장과 이강욱씨, 그리고 아르바이트 노동자 2명은 전날 오전 8시부터 출근해 17시간 동안 일했다. 12월23일 새벽 1시쯤 현장 13년 경력자인 이강욱씨는 이 아무개 소품팀장에게 “선배,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시죠”라고 말했다. 이 팀장도 “그러자”라고 동의했다. 팀원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퇴근할 준비를 했다.

10여 분 후, 상황이 바뀌었다. 세트장 안의 다른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 팀장이 “갑자기 샹들리에를 달라고 한다”라며 연장 가방을 풀었다. 〈화유기〉 세트장에는 ‘루시퍼 비밀 방’이라고 불리는 세트가 있다. 이 방 천장에 샹들리에를 달라는 지시가 제작사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12월23일 오전부터 당장 일주일 후 방영될 〈화유기〉 3화, 4화를 촬영할 계획이었고, 3화에 ‘루시퍼 비밀 방’이 등장한다.

ⓒ언론노조 제공추락 사고가 발생한 tvN 드라마 〈화유기〉 세트장. 무너졌던 천장이 보수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강욱씨는 인근 C세트장에서 샹들리에를 가져왔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한 명과 함께 가장 가까이 있는 목재 사다리를 사용해 3m 높이의 천장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샹들리에를 달았다. 평소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씨는 아찔함을 느꼈지만, 제작사가 의뢰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무서움보다 장시간 노동에 지쳐 어서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미로 같은 세트장을 뒤져 좀 더 안전한 철제 사다리를 찾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 팀장은 샹들리에에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 천장에 올라갔다.

새벽 1시50분께, 이 팀장이 올라갔던 천장이 쿵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목재로 된 들보와 천장 면이 하중을 견디지 못했다. 이 팀장은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V자 모양으로 추락해 1~2분 동안 의식을 잃었다. 이강욱씨는 선배의 다리가 경직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르바이트 사원에게 119에 신고하라고 한 뒤 팔과 다리를 마사지했다. 새벽 2시30분쯤, 이 팀장을 태운 구급차가 가장 가까운 병원에 도착했다. 이 팀장은 척추 골절 판정을 받고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이 팀장은 척추 골절로 인한 하반신 마비와 두개강 내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1월5일 현재 의식이 조금씩 돌아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상태다.

〈화유기〉 제작사는 tvN을 운영하는 CJ E&M이 70% 지분을 소유한 JS픽쳐스다. JS픽쳐스는 드라마 촬영에 필요한 세트 시공을 ‘라온’이라는 업체에 외주로 맡겼고, 소도구 담당을 MBC아트에 맡겼다. 부상을 입은 이 팀장은 하청으로 일한 셈이다.

ⓒ시사IN 신선영1월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 회의실에서 ‘tvN 드라마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쪼개기 발주가 사고의 주요 원인”

전국언론노동조합 MBC아트지부 김종찬 지부장은 1월4일 기자회견에서 “촉박한 제작 기간과 업무 계약에 없는 부당한 업무 지시, 제작비 절감 차원의 쪼개기 발주가 사고의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제작사인 JS픽쳐스가 원가 절감을 위해 전식(전기 설치 및 배선) 업무를 담당할 전문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소도구를 담당하는 외주팀에 맡겼다는 주장이다. 전국언론노조 최정기 정책국장은 〈시사IN〉에 “노조의 자체조사 결과 전식 업무 담당자를 따로 고용하지 않고 소도구팀이 맡을 경우 약 3000만~4000만원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12월28일, 이철호 미술감독을 비롯한 JS픽쳐스 관계자와 세트 시공사 라온 관계자, 전국언론노조, 고용노동부 평택지청 근로감독관, 산업안전보건공단 담당자가 사고가 난 〈화유기〉 세트장 현장조사를 했다. 세트장은 컨테이너형 창고 안에 가건물 같은 방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벽 사이로 난 좁은 길에는 촬영·조명용 배선이 널려 있었다. 사고가 난 이후 5일간 해당 세트장에서는 촬영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세트 시공사 라온 관계자는 사고가 난 ‘루시퍼 비밀 방’ 현장에서 “조명팀이 천장에 올라가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튼튼한 목재를 사용했다. 안전한 구조다”라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 담당자가 “안전하다는 기준이 뭐냐”라고 묻자 이철호 미술감독은 “그동안에 해왔던 경험상 안전한 구조라고 본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공단 담당자는 “하중을 버틸 수 있는 목재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세트 설치 30년 경력자인 전국언론노조 MBC아트지부 박종욱 사무국장은 “〈화유기〉 세트장에서 사용된 목재는 ‘스프러스’라고 불리는 저렴하고 강도가 약한 자재다. 좀 더 튼튼한 자재인 ‘나왕’을 쓸 때보다 40% 정도 가격이 절감되어 최근에는 나왕과 스프러스를 혼합해서 많이 쓴다. 그런데 〈화유기〉 세트장의 목재는 전부 스프러스였고, 옹이가 제거되지 않아 더욱 위험했다”라고 말했다. 근로감독관은 현장에서 샹들리에를 다는 데 사용했던 목재 사다리를 철제 사다리로 교체하고, 천장 작업을 금지하라는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시사IN 신선영추락 사고 이후 드라마 〈화유기〉 세트장 곳곳에는 각종 위험 안내 표지판이 붙었다.
이철호 미술감독은 현장조사 당시 “감독과 스태프는 상하 관계가 아니고 협업 관계다. 샹들리에 설치를 지시한 게 아니라 조명등을 달아야 할 것 같다고 고지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근로감독관이 “안전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는 의무는 외주업체 직원인 MBC아트에게 있는가? 아니면 세트 시공사에 있는가?”라고 묻자 JS픽쳐스 관계자는 “요청을 하면 안전구조물을 깔았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강욱씨는 〈시사IN〉에 “하청업체 직원이 현장에서 위험한 작업을 한다고 안전장치 설치를 요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갑자기 샹들리에를 설치하라는데 그 새벽에 비용과 인력을 써서 안전 조치를 해달라고 할 순 없다. 안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작업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제작사 JS픽쳐스와 MBC아트가 맺은 용역 계약에는 스태프의 안전을 누가 책임지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화유기〉 제작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는 ‘예견된 비극’이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와 고용노동부가 2017년 근로조건 자율개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한 ‘드라마 제작 근로환경 가이드라인’에는 △장시간 근로로 인한 생산성 저하 및 산업재해 위험 노출 방지 △촬영 시 검증된 안전장비 지급 △안전과 관련된 내용 교육 필요 등이 명시돼 있다. 정작 〈화유기〉 제작 현장에서는 유명무실했다.

‘제작환경 개선 대책’ 발표한 지 4일 만에

특히 tvN은 2016년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 이한빛 PD가 열악한 노동조건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례’가 있다. 이후 유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tvN혼술남녀신입조연출사망대책위원회(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불행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작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 5개 부처가 지난 12월19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대책이 발표된 지 고작 4일 만에 〈화유기〉 제작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다른 드라마 제작 현장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대책위원회가 드라마 제작 종사자 106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드라마 제작 기간 중 스태프의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19.18시간이었다. 이에 비해 평균 휴일은 월 4일, 주 0.9일이었다. 근로기준법의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드라마·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근로기준법 제59조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조항의 하나인 영화 제작 및 흥행업에 해당되어 ‘대표성 있는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 주 12시간을 넘어 연장 근로가 가능하다.

실제 제작 현장에서 제작사가 스태프와 장시간 노동을 미리 합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초과근로 수당과 야간근로 수당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시사IN〉 제504호 ‘엄마는 혼자서 회견문을 써내려갔다’ 기사 참조). 한국드라마제작협회의 2017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스태프는 대부분 일당으로 계산하여 월 집계된 총액을 월 1회 지급받고 있고, 촬영 시간과 관계없이 동일한 금액의 일당으로 계산되고 있다”. 한국드라마제작협회는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업무별로 여러 외주 제작사와 계약하는 ‘쪼개기 발주’도 흔하다. 2017년 tvN 흥행 드라마 〈비밀의 숲〉은 제작 과정에서 외주업체 17개와 계약을 맺었다. 공중파도 크게 다르지 않다. KBS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9개, MBC 〈자체발광 오피스〉는 12개, SBS 〈다시 만난 세계〉는 15개 외주업체가 참여했다. 이렇다 보니 스태프의 안전이나 처우 등 근로조건에 대해 방송사의 책임이 흐려진다. 비정규직 촬영 7년차인 한 PD는 “방송사는 드라마 제작 전권을 외주 제작사에 주기 때문에 스태프는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은 제작사에 있다”라고 말했다. 공중파 드라마 정규직 조연출 4년차인 한 PD는 “우리나라 드라마판에서 자기 안전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긁히고 부딪치는 정도는 부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1월3일 〈화유기〉 세트장을 찾았다. ‘천장 작업 금지’ ‘세트 내 흡연 엄금’이라는 표지판이 세트장 곳곳에 붙어 있었다. 고용노동부 현장조사 당시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전선은 모두 세트 벽 위로 배선이 정리되어 있었다. ‘루시퍼 비밀 방’ 앞에는 철제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JS픽쳐스 대표이사는 “언론 보도 자체가 불편하다. 드릴 말씀이 없다”라고 말했다.

tvN과 JS픽쳐스는 1월5일 보도자료를 통해 “〈화유기〉 제작 및 편성 과정상 일련의 문제에 대해 이유를 막론하고 머리 숙여 사과 말씀 드린다.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와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밝혔다. JS픽쳐스는 〈화유기〉 제작 여건 개선을 위해 전체 방송 스태프에게 최소 주 1일 이상, 최대 주 2일 휴식을 보장했다. 또한 고용노동부의 지적 사항을 반영해 개선했으며 공인 안전관리업체를 통한 안전 컨설팅을 진행해 위험한 요소를 추가로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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