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수백명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삼킨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대학 캠퍼스 안에까지 전경들이 버젓이 진을 치는 암흑기가 이어지면서 일부 학생들 역시 인생을 건 저항을 시도하게 돼. 그중의 하나가 ‘현장으로 들어가기’였어. 1930년대 브나로드 운동이나 1970년대 각지에서 열렸던 야학(夜學)처럼 노동자나 농민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즉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미싱을 타고 기계를 만지면서 민중의 일원으로서 독재정권 및 사회적 모순과 싸우겠다는 결의였지. 대학생으로서 기득권을 버리고, 부모의 간절한 기대도 눈감고, ‘내가 민중을 돕는다’는 시혜(施惠) 의식까지 내던지고 전국 각지의 공장으로 스며들었던 몇 명인지도 모를 젊음들은 우리 역사의 저물지 않는 빛으로 남아 있을 거야.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학생 권인숙도 그 빛 알갱이 중 하나였어.
권인숙의 꿈은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고 해. 이름을 읊다 혀 깨물 것 같은 서양의 꼬부랑 이름 디자이너들이 그녀의 로망이었다. 또 여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통곡을 하며 나라 망했다고 슬퍼할 정도로 ‘국가관’이 충실한 소녀였어.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녀의 핑크빛 꿈은 급속히 잿빛과 핏빛이 뒤섞인 현실에 압도되고 말았단다. “…전 인구의 70%가 넘는 노동자·농민의 수와 0.1%밖에 안 된다는 재벌과 권력층의 수와 대비한다면, 그들 두 계층 간의 생활상 차이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급으로 수 명이 매달려 살고, 1000여 평의 호화스러운 주택에 몇 명이 사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권인숙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던 서울대생 권인숙은 허명숙이라는 이름의 ‘공순이(당시 여성 노동자를 천시해서 부르던 말)’가 되어 공장으로 간다.
1986년 6월4일 가스 배출기 제조업체 노동자 허명숙, 즉 권인숙은 위장 취업자임이 드러나 주민등록증 위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됐어. 이윽고 그녀는 그곳에서 지옥과 악마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담당 형사였던 문귀동에게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한 성고문을 당한 거야. 경찰의 탈을 쓴 악마가 어떻게 권인숙을 대했는지 네게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권인숙의 항소이유서 중 한 부분을 빌린다.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성적 추행을 당하고, 눈만 감으면 나타나던 문의 두꺼운 입술과 지퍼를 푼 채 드러낸 성기와 귀에 쟁쟁한 심한 욕설.” 어떤 허약한 아버지라도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 일을 자행한 악마를 맨손으로 때려죽일 수 있을 거야. 1986년 대한민국은 그 원초적 분노마저도 막아서는 공포의 시대였어.
권인숙은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 가족이 선임한 변호사에게 털어놨으나 그들은 오히려 권인숙보다 더 공포에 질려버렸어. “그런 짓까지 하다니 이 나쁜 놈들!”보다 “이 나쁜 놈들이 무슨 짓을 더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고, 여자로서 이 모든 충격을 감당해야 할 권인숙의 미래가 막막했던 거지. 가족들은 이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간절히 권유했어. 아버지 어머니는 만약 성고문을 폭로한다면 약을 먹고 죽겠다고 울먹였고 가족들이 선임한 변호사는 만약 권인숙이 입을 닫는다면 기소유예 정도로 풀려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설득했지. 심지어 언니는 이런 편지를 보내. “네가 그것을 계속 문제 삼고 나온다면 부모님이 아마 돌아가실지 모른다.”
무슨 가족이 그러냐고? 말이 안 된다고? 아니야. 1986년 당시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어. 그저 대한민국이 말이 안 되는 나라였던 거야. 말이 안 되는 시대. 도무지 말이 말 같지 않은 시대. 말을 하려 해도 말문이 막히는 시대.
한 여성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웠던 극한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권인숙은 마침내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밝히고, 사람이기를 포기한 정권과 그 하수인의 만행을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인권변호사 조영래 등이 치를 떨며 작성한 고발장은 글자 그대로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태풍의 눈으로 인천지검에 제출됐어. 1986년 7월3일.
전두환 정권이 워낙 경찰을 편애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시 검찰은 이 범상치 않은 고발의 진위를 밝히려고 노력했어.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정권은 완강했지. ‘관계기관 대책회의’는 이런 지시를 내렸어. “수사 발표문이든 보고서든 성고문의 ‘성’자도 나오면 안 된다.” 이후 수사 보고서는 둔갑술 수준으로 뒤바뀐다. 권인숙을 “혁명을 위해 성(性)까지 도구화하는 급진 세력의 전술”을 벌인 붉은 마녀쯤으로 낙인찍은 거지.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당시 검사들의 반응을 보면 안다. “담당 검사가 들어와 대성통곡을 했고, 지검장도 회의가 끝난 뒤 문을 걸어 잠근 채 소리 없이 울었다고 한다. 모 국장은 술에 취한 채 김성기 법무장관의 차 앞에 누워 부천서 사건에 대해 확실한 말을 하기 전에는 댁으로 갈 수 없다며 울면서 발버둥쳤다(한홍구의 역사 이야기, 〈한겨레21〉 제582호).” 악질 형사 문귀동은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무려 변호사 199명이 선임계 제출
권력의 주구라 할 검사들마저 넋을 잃게 만든 성고문 사건도 금세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지는 않았다고 해. “여자가 그런 걸 까발리나? 독한 것들” 하며 혀를 차는 사람이 더 많은 나라였으니까. 이 기막힌 상황 앞에서 먼저 절규하고 나선 건 여성들이었어. 1986년 7월28일 서슬 퍼런 인천지방검찰청 현관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화염병 몇 개 던지고 도망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현관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대담한 사건이었지. 고려대 여학생 장근영·박은미·김영진 세 명이 한 일이었어.
마침내 침묵하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어. “이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무려 변호사 199명이 변호인 선임계를 냈고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어.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 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는 아빠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명문(名文) 중의 하나로 꼽는 변론 요지문이 낭독된다. 그 글을 밤새 쓰며 담배 몇 갑을 태웠던 조영래 변호사의 작품이었지. “권양(당시 언론에는 이름 없이 권양으로만 표기됐어), 우리가 그 이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억하렴.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리고 저들은 무슨 일을 했던 것인가. 아무도 모를 수도 있었다. 권인숙은 그저 성난 개에 물린 거려니 눈 딱 감고 순순히 풀려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 공포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진실을 폭로했고, 진실을 위해 일어났어. 시너를 검찰청에 들이부었고 말이 안 되는 짓을 자행하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악을 쓰며 대들었어. 그 의로운 에너지. 그게 대한민국을 이룬 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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