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3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양국은 로힝야 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합의문에 따르면 송환될 난민들은 미얀마 아라칸 주(라카인이라고도 함) 거주자로 지난해 10월9일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의 첫 공격 이후 방글라데시로 넘어온 이들이다. 난민들이 돌아갈 곳은 임시 캠프다. 미얀마 쪽 국경 ‘다르 지 자르’ 마을이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두 달 안에 첫 송환이 시작될 예정이다. 합의문에는 “난민 탈출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라는 문구가 있지만 합의문이 작성되는 그 시각에도 난민 탈출은 계속되었다. 11월28일 국제이주기구(IOM)는 “11월20일부터 7일간 방글라데시에 새로 도착한 난민 수가 1800명이다. 지난 석 달간 총 62만4251명이 도착했다”라고 밝혔다.

알리(가명) 씨는 로힝야들의 시민권을 박탈한 ‘1982 시민권법’ 이전에 적용되던 미얀마 시민권증인 국민등록카드(NRC)를 가지고 있다. 그는 지난 9월 마을을 불태우는 미얀마 군과 라카인 불교도 폭도들을 뒤로한 채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왔다. 그의 여섯 자녀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임시 카드, 일명 ‘화이트 카드’가 있다. 모두 이번 송환 ‘자격’에 부합되는 증거다. 하지만 그는 “왜 우리가 피난 왔는지 알잖나. 어떻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합의문 발표 사흘 뒤인 11월26일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로힝야 캠프에서는 난민들의 피켓 시위가 벌어졌다. 로힝야 난민들은 시민권과 인권, 각종 손실에 대한 보상 그리고 유엔이 보장하는 안전 등을 요구했다.
 

ⓒEPA10월9일 미얀마에서 탈출한 로힝야 난민들이 나프 강을 건너 방글라데시로 향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이번 합의가 국제사회의 압력에 직면한 아웅산 수치 정부의 ‘쇼’라고 평가 절하한다.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역은 지난 10월12일 대국민 연설에서 “과거 두 번의 성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난민 송환을 추진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난민 송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녀가 “성공적”이라고 표현한 과거 사례는 난민 송환 원칙을 위배했을 뿐 아니라 인도주의적 대참사를 남겼기 때문이다. 우선 1978~1979년 1차 송환 사례를 보자.

1978년 4월 당시 네윈 군사정부의 ‘킹 드래곤 작전’으로 그해 말까지 로힝야 난민 약 20만명이 방글라데시로 쫓겨났다. 1978년 5월14일자 파키스탄 일간지 〈더 돈(The Dawn)〉의 ‘버마의 무슬림들 총살당하다’라는 제목만 보아도 당시 끔찍한 상황을 알 수 있다. “4월23일 버마(미얀마) 군인 30명이 방글라데시로 국경을 넘어가는 무슬림(로힝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군인들이 여성의 가슴을 자르고 이내 칼로 찔러 죽였다.” 39년 전 기사인데 오늘날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78년 7월9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는 난민 송환에 합의했다. 난민들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저항했지만, 1978년 9월15일부터 1979년 12월까지 대부분 미얀마로 송환되었다. 당시 방글라데시 정부는 송환을 꺼려하는 난민들의 식량 배급량을 일부러 줄였다.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구호및재활부 장관인 사이드 알리 카스루는 1978년 12월12일 난민 구호 회의를 주재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난민들을 (이곳에서) 너무 편하게 만들면 그들은 버마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난민들에 대한 식량 배급량이 줄어들자, 아이들부터 숨졌다. 1978년 5월부터 12월까지 총 1만명이 굶어 죽었다. 아사자 가운데 70%가 어린이였다.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 콕스바자르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의 알란 린드퀴스트가 1979년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당시 참상이 담겨 있다. 린드퀴스트는 “같은 시기 베트남 보트 피플들이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20만에 달하는 아라칸 무슬림 난민들에 대한 관심은 극도로 적었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난민들은 난민촌에서 굶어죽기보다 미얀마 송환을 택했다.
 

ⓒEPA11월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웅산 수치(오른쪽) 국가자문역을 만났다.

1·2차 송환 때 로힝야 난민들 대규모 피해

2차 송환 사례인 1990년대 상황도 인도주의 원칙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991년 후반부터 이듬해 중반까지 25만에서 30만명에 달하는 로힝야 난민이 방글라데시로 쏟아져 들어갔다. 1992년 2월3일 방글라데시 현지 언론 〈다이니크 방글라 신문〉을 인용한 AFP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 주간 미얀마(라카인 주)에서 구금 중인 무슬림 약 300명이 아사했다.” 기사는 당시 로힝야들이 직면한 상황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1988년 민주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을 목격한 군부가 ‘분할통치’를 본격화한 시기였다. ‘피플 파워’를 두려워한 군부가 인종과 종교 간 갈등을 부채질한 것이다. 무슬림이 많은 라카인 주에 불교 정착촌과 군부대가 들어섰다. 로힝야들은 하루아침에 거주지를 뺏긴 데 이어 군 기지 건설 노역에도 강제로 동원됐다. 갈취, 구타, 여성 강간 사례가 늘었다. 당시 미국 인권운동가인 에디트 미란테는 ‘우리의 여정’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 60세 로힝야 난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2~3일에 한 번 (강제 노역에) 동원됐고 보수는 받지 못했으며 삽 등 노동 도구도 제공되지 않아서 각자 가져가야 했다. 물, 식량 제공은 전무했으며 일하다 아프기라도 하면 구타를 당했다.”

난민 송환을 위해 1992년 4월28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양국은 난민 송환 문서에 합의했다. 그때도 로힝야 난민들은 미얀마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송환을 거부하는 난민들은 구타 등을 당해 유엔난민기구가 난민 송환 협조를 일시 중단했다. 이 시기 로힝야 난민 송환 문제를 조사한 미국난민협회(USCR)에 따르면 1995년 2월 기준 로힝야 난민 15만5000명이 미얀마로 송환됐다. 그리고 많게는 9만5000명으로 추정되는 난민들이 송환을 피해 방글라데시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지난 1·2차 송환을 거부하고 방글라데시에 남은 이들이 있다. 그렇게 남은 이들과 이후 꾸준히 몰려든 이들 가운데 3만명 정도만이 유엔 등록 난민이다. 그 열 배 이상의 ‘미등록’ 난민들은 주로 방글라데시 국경지대 곳곳에 있는 로힝야 슬럼가에 모여 산다. 필자가 여러 정보원을 통해 묻고 또 물어서 2014년 찾아갔던 한 로힝야 슬럼가에는 1978년부터 탈출한 피난민들이 모여 조용히 살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웅산 수치의 ‘성공적인 난민 송환’에 응하지 않을 로힝야 난민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명 방콕·이유경 (프리랜서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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