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 쉼터를 찾은 가해자를 두둔했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결국 퇴사했다. 한양대에서 총여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폐지 요구를 받는다. 어제까지 어떤 싸움도 명쾌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 싸움이 또 시작된다. 주된 싸움터는 유일하게 목소리 낼 수 있는 피난처이자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온라인이다. 응답 없는 현실에 차오르는 절망, 새롭게 등장한 가해자에게 치미는 증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모여 있는 곳. 가상세계로 불리는 이곳에서 실재하지 않는 싸움은 단 하나도 없다. 전부 현실에 발 딛고 있다. ‘모든 차별에 반대합니다’ 같은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현실 말이다.

그 와중에 배우 유아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며 평화를 찾자고 제안했다. 멋진 일일 수 있었다. 한 누리꾼에게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느냐는 말을 던지고, 스스로의 젠더 권력을 성찰하라는 다른 누리꾼들의 요구에 ‘증오를 페미니즘으로 포장하는 메갈 짓을 멈추라’고 말한 직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메갈 짓’으로 싸잡힌 투쟁을 하던 이들 중 증오 대신 다른 것(주로 사랑)을 택하자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 말을 자신의 목소리로 내어보지 않은 이는 과연 있을까. 나만 해도 확신에 차서 내뱉던 내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왜 굳이 화를 내야 해?’ 저 멀리서 방관하던 위치에 있던 부끄러운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그 좋은 평화를 얻어내려 죽도록 싸우는 사람들에게 무례를 범한 지금을 언젠가 부끄럽게 여길까, 아니면 언제까지고 같은 자리에 머무를까. 그의 변화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남성이 다른 페미니스트를 준엄하게 꾸짖음으로써 진정성을 가로채는, 여성의 투쟁이 긴 역사에 걸쳐 겪어온 이 지겨운 사건이 또 한 번 반복되는 일을 막고 싶다. 아무 여성에게나 반말로 대꾸하다 남성 평론가에게는 공손한 존대로 대답하던 그가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으로 손쉽게 얻은 인정은, 수모와 오명을 무릅쓰고 지지부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몫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가짜라고 폄하당했다. 반면 유아인은 수많은 남성들의 환호를 등에 업으며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바로 다음 날에 그가 일으킨 사건이 이제 어떤 연쇄반응을 부를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장 학교에서 성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여학생들이 감수하던 위협과 모멸감의 정도가 한층 커질 것이다. 페미니즘적 발화를 낙인찍고 싶어 하던 이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평화는 한층 요원해졌다. 수습은 늘 그렇듯 싸우던 이들의 몫이다. 마음 깊이 염원하는 숭고한 결말이 눈앞에서 또 한 뼘 멀어진다.

‘유아인의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만 남은 사건

이 사태는 결코 새로워서가 아니라 식상할 만큼 익숙해서 괴롭다. 막막한 현실에 맞서 변화를 만든 여성들은 동시대 남성들에게 단 한 번도 존중받지 못했다. 언론을 통해 ‘유아인의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만 알려졌을 이 사건은 그 오랜 역사를 또 반복했다. 페미니스트가 오욕의 역사 속에서 싸우는 상대는 불의 대신 불의로 인한 분노를 불편해하는 자다. 그 상대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한 이들도 늘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역사를 무시한 채 훈수 두는 위치부터 차지하며 등장한다면 그는 십중팔구 보기 드문 깨인 남성이 아닌 발에 차이게 흔한 남자일 것이다. 상차림에 드는 공은 우습게 보면서 대뜸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수저부터 들기 바쁜 그들의 일장연설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기자명 이민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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