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한민국을 울렸어. “(전략)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일대 민족주체 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 2개월간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이른바 10월 유신의 출범이지.

이 시대를 ‘제4공화국’이라 일컫긴 한다만 차마 공화국이라고는 부르기 민망한 때였어. 유신 첫해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총 2359명이 투표를 했는데 박정희는 2357표를 얻는다. 북한 역시 “100% 투표, 100% 찬성”을 자랑하고 있었던바, 그즈음 남북한의 정치는 남북이 ‘한 핏줄’임을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 시기는 남북 각각에 또 하나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 후로 북한은 사실상 세습 왕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남한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험난한 여정에 나섰으니까.

가톨릭 성가 28장의 가사 1절은 이런 내용이야.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들 가는가.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가톨릭 성가를 소개하는 이유는 유신의 암흑기에 등불처럼 빛났던 한국 가톨릭의 역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야.

유신이 선포되던 날 가톨릭의 수장 김수환 추기경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어. 유신 소식을 들은 김수환 추기경은 단호하게 이야기해. “박 대통령이 이렇게 정권욕에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하면 나라만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도 결국 불행하게 끝날 것입니다(〈아, 김수환 추기경 1〉 이충렬 지음, 김영사 펴냄).” 얼굴이 창백해진 외교관들 앞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금을 박아버렸어. “이 말을 꼭 대통령께 보고하시오.”

ⓒ연합뉴스1972년 8월, 김수환 추기경은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절친한 친구 가운데 지학순 주교라는 분이 있어. 지 주교의 고향은 평안도 중화였어. 공산주의자들과 부딪친 끝에 남쪽으로 왔고 전쟁이 터지자 신학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군에 입대해 인민군과 맞서 싸운 분이야.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친구 김수환·윤공희 등과 함께 한국 천주교의 지도자로 성장하지.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5·16재단은 1970년 원주문화방송을 지으면서 원주 가톨릭교회에 제휴를 요청하게 돼. 지방 소도시에 방송국 설립 자본을 감당할 기업이나 유력자가 없었던 거지. 원주교구 주교였던 지학순 주교는 이를 허락하고 공동출자해서 방송국을 설립하게 되는데 5·16재단이 권력을 믿고 온갖 수단으로 돈을 빼돌려 배를 채우는 걸 발견해. 시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학순 주교는 바로 행동에 나섰지. 1971년 10월5일 시민 1500명이 운집한 가운데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연 거야. 대학생 시위가 아닌 일반 신자와 시민 중심의 ‘가두 투쟁’은 한국 역사상 거의 처음이었다고 해. 유신체제 성립 후 지학순 주교의 강론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그의 말은 바늘이 되어 박정희 정권의 엉덩이를 콕콕 찔러댔어. 박정희 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더러 “지학순 주교를 해임해주시오!” 요청하기도 했지. 사실 주교 임명은 로마 교황의 권리이며 추기경이 주교를 해임하고 말고 할 수는 없어.

다른 지역의 민주화운동가나 학생들에게 원주는 일종의 소도(蘇塗)이자 피난처였어. 수많은 사람들이 원주에 와서 성당의 보호를 받거나 지학순 주교가 쥐여주는 돈을 받아 도피 자금으로 썼다. 그 가운데에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쓴 시인 김지하와 후일 북한과 연계된 반정부 조직으로 규정돼 사형선고를 줄줄이 받게 되는 ‘민청학련’ 조직 소속 학생들도 있었어. 수사 과정에서 민청학련 활동 자금을 북한에서 나온 것으로 조작하려는 공안당국에 맞서서 김지하는 그 돈이 지학순 주교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히게 돼. 그러자 정부는 해외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지학순 주교를 냉큼 연행해버렸어.

주교는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야. 그 주교를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잡아채간 것은 중대한 문제였지. 가톨릭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서 지학순 주교는 수녀원에만 머문다는 조건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하릴없이 수녀원이나 병원에서 시간을 보낼 사람이 아니었어. 사형선고가 교통 위반 딱지처럼 뿌려지던 상황에서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감옥에 가야 한다고 결심해. 군법회의 재판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오자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문’을 써서 세상을 향해 읽어내렸어.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5년 7월20일, 지학순 주교(가운데)가 환영 인파와 함께 원주 원동성당을 향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기본 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짓밟은 것이다. 반대 의사를 말하면 사형이나 종신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소위 긴급조치 1호와 4호라는 것은 우리나라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다. (중략) 이상 기록한 것이 나의 기본적 주장이며 생각이다. 이 외에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반대 의사를 말하면 사형이나 종신징역에 처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서슬이 시퍼렇게 쑥물 들고 있을 때였고, 지학순 주교는 징역 15년이라는 어마어마한 형량을 선고받았단다. 지학순 주교는 송곳처럼 꼿꼿하게 세운 양심으로 권세와 폭력을 치렁치렁 매단 국가권력과 맞섰고 그 안에 감춰진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세상에 폭로했어. 유신헌법은 우리가 치워야 할 쓰레기일 뿐이고, 자신이 무슨 회유나 고문을 받아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더라도 진실은 결코 본인의 양심선언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외침은 이후 김지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어받게 된단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지난겨울 참 많은 이들이 수천 번 부른 노래다만, 항상 참이 거짓을 이기는 건 아니고 진실은 때론 기나긴 시간 수면 아래 잠겨 있기도 해. 결국 참의 손을 들어주고 진실을 건져 올리는 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손과 발, 그리고 어깨와 머리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200여 일 만에 석방된 지학순 주교가 원주로 돌아왔을 때의 풍경은 그 이후 우리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보여주는 프롤로그였다고 생각해.

그때 원주 인구는 10만명이 좀 넘었는데 3만명이 원주역으로 모여들었어. “우리 주교님 오신다!” 중·고등학생 밴드의 힘찬 연주 속에 사람들은 지학순 주교 만세를 부르며 그들의 사제를 맞았고 청년들은 경의의 표시로 웃옷을 벗어 땅에 깔아 지학순 주교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했다. 칼바람이 나라를 휩쓸고 있었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결코 양심이 패배하리라, 진실이 꺾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이런 역사를 알고 또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안락에도 굴하지 않고(노래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중에서)” 어둠을 폭로하고 빛을 향해 걸었던 사람들이 끊이지 않은 나라란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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