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고민을 토로했다. “집에서 독립을 하고 싶어서 투잡을 뛰어도 비싼 보증금 마련하기가 힘들어요. 내가 사는 지방 정부에서 청년 주거 지원책이 나왔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세상에 정책 시행 목표 연도가 2022년이네요.” “불안했지만 내 길이다 생각하고 빚을 내서 창업을 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사업을 접었어요. 실패도 실패지만 도전의 앞뒤가 너무 힘들었어요. 아무런 안전망 없이 무모하게 뛰어들어야 하고, 실패하고 나서는 재도전할 기회도 없이 모든 피해를 감수해야 하고…. 후배들이 나를 보고 ‘나도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라며 창업을 포기하는 모습도 안타까웠어요.”

지난 11월23일 부산시 양정동의 청년 커뮤니티 공간 ‘비밀기지’에서 ‘청년1번가’ 첫 오프라인 행사가 열렸다. 부산·울산·창원·안동·대구 등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모인 청년 30여 명이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청년을 위해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머리를 맞댔다. 이날 부산(경상권)을 시작으로 12월2일까지 대전(충청권), 춘천(강원권), 광주(전라권), 제주(제주권), 부천(수도권)에서 청년 정책 제안 권역별 원탁회의가 이어졌다. 각 지역 청년들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그림일기로 그려 공유하고 청와대 봉황 문장이 찍힌 청년 정책 제안서에 아이디어를 적어 냈다. 청년1번가 행사를 주최한 곳은 행정안전부 사회혁신추진단. 정부는 청년1번가에서 나온 청년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향후 청년 정책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종합적인 청년 정책과 실행 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다.

ⓒ시사IN 신선영11월23일 부산의 청년 커뮤니티 공간 ‘비밀기지’에서 영남권 ‘청년1번가’ 원탁회의가 열렸다.
청년1번가 원탁회의에서 청년들은 여러 청년 정책을 제안했다. 청년들에게 재충전과 진로 탐색의 시간을 제공하는 ‘갭이어 지원 정책’, 당장 돈이 안 되는 것에도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완충장치로서 ‘청년 도전 드림팀’, 노인정처럼 청년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인 ‘청년정 개설’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안들이 많이 나왔다. 11월28일 춘천에서 열린 원탁회의를 지켜본 하인호 행정안전부 디지털사회혁신팀 과장은 “보고서로 접해서는 알 수 없는 청년 문제들을 많이 실감했다. 자신들이 겪는 문제와 필요한 정책을 이야기하는 청년들의 말투와 표정을 직접 보면서 감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도 참석했다.

공무원들이 판을 깔았지만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은 청년 당사자들이 직접 맡았다. 부산 행사에 참석한 류설아 경남청년유니온 사무국장은 “청년 정책은 청년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제껏 정부나 지자체가 잘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행안부가 청년 단체 네트워크와 이런 행사를 함께 기획·진행하는 걸 보면 예전과 달리 청년을 (청년 문제 해결의 주체로) 인정하려는 노력은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청년1번가 오프라인 행사 진행을 맡은 청년단체 협동조합성북신나의 조합원 박동광씨는 “우리끼리 이야기한다고 진짜 반영되는 건지 의문스럽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부 측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그래도 반응이 있구나’ 했다. 참석한 청년들은 특히 정부를 향해 여론 수렴 이후의 구체적인 청년 정책 행보를 공유해달라는 제안을 많이 했다”라고 말했다.

청년 정책은 많다. 하지만 모두 쪼개져 있다. 청년 주거 문제는 국토교통부의 주거복지 정책 안에, 청년 일자리 문제는 고용노동부의 취업 정책 안에, 청년 교육 문제는 교육부의 대학교육 정책 안에 흩어져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마다 펼치는 청년 정책의 수준과 결도 가지각색이다. 이런 까닭에 청년 삶을 연속성 있게 바라보고 탐구하는 정책이 없다고 많은 청년들은 호소한다.

‘일자리’ 문제를 넘어선 사회문제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당신들이 희망이다”라며 치켜세우지만 늘 들러리처럼 이야기 한번 ‘듣고’ 지나가버리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반영시키기 위해 그간 크고 작은 청년 모임들이 전국에 생겨났다. 목마른 청년들이 먼저 네트워크를 만들어 우물을 판 셈이다. 청년들의 이런 움직임은 지자체에 먼저 반영됐다. 2015년 서울시 청년기본조례를 시작으로 여러 지자체들이 청년 관련 조례를 만들었다. 청년 문제를 ‘일자리’를 넘어선 종합적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사회적 틀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틀 안에 내용이 잘 채워지지 않았다. “재정 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의 경우 자체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청년 정책의 규모와 범위가 대단히 협소하고, 청년 인구 유출이 심각한 지역은 의견 수렴을 할 수 있는 당사자 집단의 발굴과 모집에도 어려움을 겪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은 청년 지원에 대한 기성세대와 관료 집단의 저항이 매우 거세”(전국청년정책 네트워크 오윤덕 운영지기)기 때문에 조례가 있어도 실제 정책 수립과 시행 양상은 천차만별이었다. 결과적으로 청년 정책이 잘 진행되는 지역의 청년은 청년수당도 받고 취업 상담도 받고 문화 경험의 기회도 얻는 데 비해, 청년 정책이 낙후된 지역의 청년은 아무 정책의 수혜도 누리지 못하는 격차가 점점 더 커졌다.

ⓒ김흥구11월23일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오른쪽 세 번째)이 청년기본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바로 ‘청년기본법’이다. 청년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규정해 전국의 모든 청년이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법이다. 청년유니온 김민수 위원장은 “현재 지방정부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청년 정책의 형성 과정이 집합적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국회와 중앙정부 차원에서 청년기본법과 같은 법률을 조속히 재정비해 제도적 뒷받침에 나설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국회에 청년기본법안 7개가 올라와 있다. 딱히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지만 ‘굳이 총대 메고 나서는’ 정치인 또한 적어서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목마른 청년들이 먼저 우물을 팠다. 지난 9월21일 청년단체 40여 개가 모여서 청년기본법 제정을 위한 청년단체 연석회의를 꾸렸다. 여러 차례 간담회를 거치고 거리에서 시민 1만여 명에게 청년기본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지난 11월23일 국회에서 서명지를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하고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위원은 “사회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사회 추세로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 정책은 더 이상 유년, 소년, 장년, 노년과 같은 세대 정책의 위치를 가지는 게 아니다. 청년 정책은 불확실성과 위험이 커지는 세계에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주체’를 형성하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청년기본법 제정을 위한 청년단체 연석회의는 내년 상반기 통과를 목표로 청년기본법 제정 촉구 운동(facebook.com/youthlaw2017)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청년1번가’ 정책 제안은 온라인(youth1st.kr)에서 계속 받고 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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