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넘어지는 연습
조준호 지음, 생각정원 펴냄

“3등. 금빛 영광을 놓쳤음에도 포기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거머쥘 수 있는 등수.”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으레 그렇듯, 저자 조준호씨 역시 20년간 운동만 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은 그 과실이자 결말이었다.
시상대에서 그는 ‘다음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봤다. 스물여섯에 은퇴한 뒤 유도 체육관을 운영하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 중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추천할 만하다. 외부인이 알기 어려운 국가대표 선수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태릉선수촌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선수의 문장이 땀 냄새를 생생히 전한다. 어린 나이에 큰 영광과 좌절을 마주한 저자의 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논어〉 속 사자성어를 들어 ‘인생 낙법’을 말하는 메달리스트의 모습은 근래 본 전직 운동선수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다.

현실의 경제학
스티븐 S. 코언·J.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정시몬 옮김, 부키 펴냄

“보이지 않는 손의 팔꿈치를 들어 올려 새로운 자리로 재배치한 것은 정부였다.”

경제는 언제 성장하는가?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성장이 ‘뉴노멀’로 불리는 우리 시대에 절박하게 던져진 질문이다. 경제사에 정통하면서 미국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다뤄본 저자들이 이 질문에 답한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미국 경제사의 구체적인 물줄기를 짚어낸다. 우리는 혁신을 스티브 잡스의 차고에서 일어나는, 오로지 민간 영역의 공으로만 생각하곤 한다. 책은 그게 신화라고 폭로한다. 진정한 혁신은 정부가 첨단 기술에 적극 투자할 때 일어났다. 잡스의 차고만 쳐다보다가는, 아이폰을 구성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정부 지원의 산물이었음을 잊게 된다.
이 정부 주도 혁신의 물줄기를 말려버린 주범이 1970년대 이후의 ‘금융화’였다고 책은 주장한다.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케일럼 체이스 지음, 신동숙 옮김, 비즈페이퍼 펴냄

“그렇다. 이번에는 다르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왔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 잔존하거나 혹은 끊임없이 창출되면서, 노동은 인간에게 생계 수단은 물론 삶의 의미까지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로 건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조만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경제의 특이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노동의 운명’에 대한 갑론을박이 아니라, 특이점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황당한 미래상을 장황하게 떠드는 대신 ‘소유권’ ‘자원 배분’ ‘소득·자산 분배’ 등 사회·경제의 기본 틀이 어떻게 변화될지 차분하게 풀어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대안도 차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서유견문
유길준 원저, 장인성 지음, 아카넷 펴냄

“저들 인민의 부지런한 습속과 사물의 번창한 경상을 보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저자는 〈서유견문〉을 한국 보수주의의 원점이라고 평가한다.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읽고 떠올린 사람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일등 공신이자 근대 일본의 설계자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였다.
선비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유길준은 신사유람단과 보빙사의 일원으로 일본·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어 상인과 같은 현실 인식을 가진다. 변방의 하급 무사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는 소속된 번을 벗어난 낭인으로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스스로 방향을 잡아간다.
유길준은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오개혁을 주도하고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조슈 동맹을 성사시켜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유신의 초석을 놓는다. 〈서유견문〉은 개혁의 설계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외 지음, 다산책방 펴냄

“나는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며, 사랑을 죽이는 가부장제의 해독제라 생각한다.”

표지에 스스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선언한 이 책은 여성 작가 7명이 꾸렸다. 오롯이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집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엄마·며느리·딸· 애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 이물감 없이 쉽게 읽히는데, 소재 자체가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의 글이 표제작이다.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현남 오빠’는 연인이라는 관계를 내세워 주인공을 의존적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과거를 하나씩 꼬집으며 떠나겠다는 주인공의 이별 선언이 통쾌하면서도, 저자가 작가노트에 써놓은 것처럼 ‘스토킹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든다. 이 책에 실린 일련의 소설이 단지 픽션으로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같이 널리 읽자고 권하고 싶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현실문화 펴냄

“한국 내전은 1935~45년의 10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경악스러운 혼란에 그 뿌리가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한국전쟁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저자가 새로운 사료를 반영해 쉬운 필치로 써내려간 역작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벌어졌던 항일투쟁에서 찾는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두 세력으로 분열됐다. ‘항일세력’과 ‘부역세력’이다. 만주에서 유격대 투쟁을 벌인 이들은 북한 지도부의 핵심 계보를 형성했다. 미국은 소련 주변부에 자생 가능한 정권을 배치하기 위한 ‘대 초승달’ 전략에 따라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키고 남한을 이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부역세력의 복권이 이루어졌고 한국전쟁에 ‘내전’으로서의 성격이 가미됐다. 한국전쟁의 뿌리와 근원적 성격을 간과한 채 북한의 체제와 지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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