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였다. 노약자석 앞에 서게 되었다. 신문을 보고 있던 한 어르신이 “진즉에 이랬어야지, 도둑놈들” 이라는 말을 다 들리게 내뱉었다. 나와 내 주변에 섰던 이들이 거의 동시에 그이를 바라볼 정도였다. 신문의 정치, 경제, 사회면을 읽다가 저런 소리를 내뱉는 거야 비일비재하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보아하니 그이가 읽고 있던 면에는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5명의 추모식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말의 쓰임에 적재적소가 있음을 아직 알지 못하고 또한 앞으로도 알 수 없기를 바란다. 어느 누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자 하겠는가. 가슴에 묻기 위해 존재하는 말에 얼마나 무거운 슬픔의 추가 달려 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때로는 말하는 이의 얼굴이 그 모든 말할 수 없음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유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그 말 속에 들어본 적 없는 말이 그리고 말해본 적 없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이의 얼굴에서 내가, 우리가 보는 것은 영혼을 믿는 자들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시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죽음은 가장 구체적인 관념의 시공간이 되기도 한다. 유가족의 얼굴이란 그런 곳으로 향하는 통로이다.
며칠 전, 한 마을학교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시 낭송의 밤’에 초대되어 다녀왔다. ‘곁’이라는 제목이 붙은 행사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또한 곁에 사람을 두는 일을 쉬이 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곳에서 최근에 쓴 청소년 시를 낭독했다. 어른들이 모른 체하는 청소년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시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단어의 범용이 줄어든 말이 있고 문장의 형편이 달라진 말들이 많다. ‘세월’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노란색’이나 ‘가만히 있어라’는 말이 그러하다. ‘청소년’이라는 말도 그렇다. 이제 내게 청소년이라는 말은 기쁨의 형태보다 슬픔의 형태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청소년들 앞에서 청소년이 등장하는 시를 읽기 전에 “기쁨에 집중하는 청소년도 좋지만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청소년도 좋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청소년들과 ‘기억하려는 시’와 ‘들려주려는 시’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괜찮았으나 청소년들의 목에 걸린, 노란색 리본이 달린 목걸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 결국 눈물이 났다. 그들이 목에 걸고 있던 것은 목걸이였으나 목걸이만이 아니었다. 그 목걸이는, 목걸이를 목에 거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어 같았고, 하나의 문장 같았으며, 한 편의 시처럼 보였다. 곁에서 내가 보고 듣고 만난 것은 아직도 여전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미래의 목소리, 미래의 형태, 미래의 태도였다. 염원했다. 청소년 모의 대선 투표에서도 차별과 혐오 발언을 일삼은 후보를 뽑지 않았다는 그들에게. 저는 아름답지 않지만, 여러분들은 아름답겠습니다.
노란색 리본이 더없이 무겁구나
‘추모식’ 기사를 보다가 태연히 ‘도둑놈들’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어른은 아름답지 않다. 그 어른이 다른 모든 순간에 아름답다 해도 그 순간만은 추한 사람이다. 자기 스스로 죽음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존재의 가치를 자본에 종속시키는 사람 앞에 서 있자니 가방에 달린 노란색 리본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이미 무겁기 위하여 지니고 다니는 그 사물이.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5명의 추모식에서 가족 세 명을 잃은 권오복씨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한 말은 “왜 못 돌아와.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아직도 찬 바다에 있는 거야”였다고 한다. 들어본 적도 없고 말해본 적도 없으나 해봄 직한 말도 있다. 양승진·남현철· 박영인·권재근·권혁규님 가슴에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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