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인천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결혼을 하고 나서 첫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20년 넘게 살았다. 서울에서 전세살이를 하기에도 지쳤고 그마저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던 참이어서 마침내 인천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년 반 전쯤에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집을 사서 이사했다.

지방 도시에 옮겨 앉고 보니 서울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많이 눈에 띈다. 도시가 확연하게 활기를 잃었다. 예전에 인천교육대학을 비롯해 중·고등학교가 밀집해 교육환경이 좋아 고급 주택이 많았던 우리 동네는 퇴락해가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왔듯이 이곳에는 빈집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노인들이 인화성 높은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석유난로나 연탄난로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집도 많아 지역 공무원들은 언제 불이 나서 참극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햇빛이 좋을 때면 공터에 노는 아이들은 없고 노인들만 잔뜩 쭈그리고 앉아 있다. 당연히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집도 희귀하다.

인천대를 비롯해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는 학교 단지에 가보면 더욱 을씨년스럽다. 인천대가 송도 신도시로 옮아가는 바람에 텅 빈 본교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몰골로 유령처럼 서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지만 내게는 이마저도 지속 가능한 풍경처럼 보이지 않는다. 점점 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지나면 도대체 이 도시는 어떤 흉물로 변할까. 더욱 기막힌 점은 이른바 이 세상 주류의 시각에서는 이곳의 문제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지역 간 불평등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수준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낙후된 주거 환경, 낮은 교육 수준, 높은 노인 인구, 자가용 소유 여부, 이혼 등의 지수를 수치화한 지역박탈지수가 높을수록 회피가능사망률(예방가능사망률+치료가능사망률) 역시 높다. 쉽게 말해 변방에 살수록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해 억울하게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다. 지역박탈지수가 가장 높은 곳의 예방가능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160.86명, 지역박탈지수가 가장 낮은 곳의 예방가능사망률은 74.13명으로 두 지역의 절대 격차는 86.73명이나 된다. 지역에 따른 기대수명과 평균수명의 격차도 눈이 커질 정도이다. 서울대 의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운영실에 따르면 소득 수준 상위 20%가 하위 20%에 비해 평균 6.1년을 더 오래 산다. 서울 강남 지역의 기대수명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실제 수명과도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이다. 영국 런던의 첼시에서 태어난 사람은 랭커셔 주의 항구도시 블랙풀에서 출생한 사람보다 9년이나 더 산다. 미국의 최부유층 1%와 최빈곤층 1% 사이의 기대수명 격차는 10~15년에 달한다. 미국의 부유한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하위 20%에서 태어난 아이는 좀 더 가난한 지역인 디트로이트의 같은 조건 아이에 비해 미국의 상위 20%에 속하는 어른으로 자라날 확률이 두 배나 더 높다. 중국의 경우 상하이나 톈진 같은 대도시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프랑스나 일본에 근접할 정도로 늘었으나 다른 많은 지역의 수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틈만 나면 공산당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시진핑 지도부로서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OECD 보고에 따르면 지역 간 1인당 소득 격차는 영국·독일·미국·프랑스 등에서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한국·이탈리아·일본·스페인 등이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앞으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지리라는 뜻이다. 지역 간 불평등은 진짜로 국가 차원의 골칫덩어리로 떠올랐다.

1848년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놀랍게도 그의 얘기는 150년이 지났을 때부터 점점 쉽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게 되면서 노동의 수요와 가격이 국가의 관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지역의 불평등은 정확하게 마르크스가 예언한 그대로 세계화의 산물이다.

전통 경제이론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 지역 간, 국가 간 빈부 격차는 사라져야 정상이다. 부유한 지역의 잉여 자본은 가난한 지역의 개발되지 않은 잠재력에 투자될 수밖에 없다. 전체 경제 체제를 통해 기술도 빠르게 퍼져나간다. 실제로 20세기에는 이런 생각이 똑 떨어지는 듯 보였다.

ⓒ한성원 그림

2차 세계대전 후 후발 산업국가가 부자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예를 들어 1950년 이탈리아의 1인당 생산은 미국의 33%였으나 1973년 62%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비슷한 통합이 일본과 유럽에서도 일어났다. 산업화된 체제 사이의 지리적 이점은 줄어들고, 이 체제와 전 세계 나머지 체제 간의 격차가 커졌다. 1870년 미국의 소득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9배에 못 미쳤는데 1990년대에는 거의 50배가 되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흐름이 바뀌었다. 가난한 나라들이 부자 나라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자 나라에서의 지역 간 불평등이 커졌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2015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에 메트로폴리스 지역의 경제는 크게 약진하고 중간 도시들이 비틀대기 시작했다. 값싼 인력을 잔뜩 보유한 경제와 부유한 경제가 교역을 시작하면 양쪽의 비슷한 기술을 지닌 노동자의 임금은 접근하게 마련이다. 부자 나라의 노동자는 가난해졌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는 돈을 더 벌었다. 세계화는 이렇게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지에 직접 타격을 가했으며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지만 각 정부를 움직이는 엘리트는 무심했다. 그래서 아주 짧은 동안에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곳의 중소 도시들이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제조업과 블루칼라가 몰락해 이른바 ‘녹슨 지대(러스트 벨트)’라는 곳에서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든 반이민 정서와 반엘리트 정서가 자라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 스크랜턴 시의 주민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어 펜실베이니아 주를 그에게 통째로 바치게 하거나, 영국의 티사이드 지역이 브렉시트에, 프랑스의 북부가 마린 르펜의 인민전선에 넋을 뺏기게 만든 그 힘이다. 그리고 최근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거는 그 힘이 아직 전성기를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했다.

부자 나라 노동자는 가난해지고 가난한 나라 노동자는 돈 더 벌어

늦은 감이 있지만 미국과 유럽의 주요 정치 세력은 이 같은 지역 간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궁리 중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가난한 곳에서 부유한 곳으로 옮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1990년대 이후 사람들의 기동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부유한 지역에서 천문학적으로 치솟은 집값이나 임대료가 새로운 사람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 노릇을 한다. 예전 세대와 달리 지금 세대는 나이를 많이 먹어 모험을 잘 하지 못한다. 역마살이 낀 것처럼 보였던 미국 사람이나 국가 간 경제 장벽이 사라진 유럽 사람들이 부모가 사는 반경 30㎞ 이내에서 통 벗어나려고 하지 않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북아시아 국가의 중소 도시들은 점점 더 나이 많고 못사는 사람들이 몰려 사는 쪼그라드는 원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각국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가 가장 많이 해온 일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다. 땅을 거의 무상으로 주고 세제 혜택을 주면서 국내 유명 기업이나 해외 기업들을 끌어들여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겉보기만 요란하고 지역의 정치가나 언론에게만 이로울 뿐 정작 지역 주민들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다. 가장 심각한 예로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42개 공단이 있지만 거의 고용을 창출하지 못해 눈총을 산다. 고용이 늘었더라도 인근 지역 사람들을 뺏어오는 제살 뜯어먹기인 경우가 태반이다.

미국에서는 교육 부문, 특히 다시 지방의 대학을 일으켜 세워 지역의 농민과 엔지니어와 연계해 새로운 기술과 노하우를 개발하게 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19세기 말 연방 소유의 땅을 주에 무상 불하해 그 땅을 팔아 지역 대학과 칼리지를 세우도록 격려했다. 그 대학들이 미국 전역에서 젊은 농부와 엔지니어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며 미국을 부흥하게 만드는 기초를 다졌다. 미국은 이미 훌륭한 연구대학으로 성장한 이 대학들에 연구보조비를 지급하는 한편 지역 맞춤형의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새로운 대학을 더 설립해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 차라리 지역의 대학에 투자하는 게 글로벌 기업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배만 불려주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시사IN〉처럼 올해 10주년을 맞은 제주올레는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올레는, 세계화가 지향하는 규모의 거대화와 스피드화만이 정답인 줄 알고 그걸 숨차게 따라가느라 죽어가던 지역에,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이런 법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지역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속살을 보여주는 게 난쟁이가 세계화를 이길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제주올레 10주년 기념 축제가 열리던 날, 지금은 인천 사람들에게조차 잊혀가는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북성포구에서 회 한 접시를 시켜놓고 인천만의 색깔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축제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참고한 활자:〈자본론을 읽다〉(유유),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인디펜던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