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5일 일본에 사는 강화옥 할머니(97)는 휠체어를 타고 아들 부부와 딸 부부, 손녀와 함께 고향 제주도를 찾았다.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뒤 90년 만의 고향 방문이었다. 남편인 고 강우규의 구명운동을 하면서 부부가 된 고이즈미 요시히데와 고이즈미 준코, 사토 야스코 씨도 동행했다. 이번 고국 방문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던 강우규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더 뜻깊은 여행이었다.

강화옥의 남편 강우규는 열여섯 살에 고향 제주도 중문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고 한국의 정세가 불안해서 일단 귀향을 포기했다. 그래도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살리라는 꿈을 꾸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꿋꿋하게 살았다. 1972년 같은 제주 출신인 지인이 서울에 ‘대영플라스틱’이라는 회사를 만들자 감사역을 맡았다. 남은 생을 조국 땅에서 살기 위한 준비였다.

그때부터 서울과 제주도를 다니던 강우규는 1977년 1월 한국에 갔다가 연락이 끊기고 사라졌다. 두 달 뒤인 3월24일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의 주범으로 한국 신문 1면에 등장했다. 이 사건은 일본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해 6월 1심, 11월 2심, 이듬해 2월28일 대법원 판결까지 거쳤지만 강우규의 간첩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령경제공90년 만에 고향 제주도를 방문한 강화옥 할머니(앞)가 남편 강우규씨 형의 위패가 모셔진 4·3평화공원을 찾았다.
강화옥과 두 딸 강국희·강신자씨는 밤낮으로 일해 변호사 비용과 영치금을 마련했다. 강화옥·강국희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강우규를 구원하는 모임’과 함께 간첩 혐의를 뒤집는 알리바이나 증거를 찾아냈고 그것들을 들고 매일 집 근처 역 앞, 일본 국회 앞, 긴자 거리, 유엔 인권위원회를 찾아가 강우규의 무죄와 석방을 호소했다. 사형이 확정된 1978년부터는 사형 집행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단식투쟁을 벌였고 수차례 시민들의 서명을 모아 전달했다. 하지만 한국 재판부는 이들의 호소를 모두 무시했다. 고 강우규는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다 거짓 자백을 해 사형수가 된 자신을 책망했고 자신 때문에 같이 간첩으로 몰린 지인들과 동생에게 미안해서 수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일본에서의 구명운동 덕분에 그는 1988년 12월21일 가석방되었다. 스무 살, 식민지 종주국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던 강우규는 예순 살에 조국에서 간첩이 되어 감옥에서 11년을 살았다. 그리고 2007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우규 가족이 뜻하지 않게 사건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2009년 10월이다. ‘주범’인 강우규와 만나지 않았으면 ‘간첩’이 되지 않았을 사람이 10명 있었다. 그중 1979년 뇌출혈 증상으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석방되었다가 곧 세상을 떠난 김추백의 딸 김호정씨가 강우규 가족을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던 김호정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낙심했다. 그때 필자와 김씨가 만나게 되었고, 필자는 30여 년 전 일본의 ‘강우규를 구원하는 모임’에서 만든 뉴스레터와 사건의 조작을 증명하는 보고서 등을 전해줬다. 그녀는 자료들을 읽으면서 제주도에서 태어난 강우규는 왜 재일조선인이 되었으며, 왜 고향을 방문했다가 간첩으로 조작되어야 했는지 궁금해졌다며 필자에게 강우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강우규가 고인이 된 후 모든 것을 잊고 지낸 가족들로서는 강우규의 진술 때문에 구속되어 목숨까지 잃은 피해자의 딸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강우규의 삶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김호정씨에게 가족들은 마음을 열었다. 2010년 1월 강화옥과 가족들은 진화위의 조사관이 일본으로 조사를 하러 왔을 때 적극 협조했고, 그해 5월 진화위는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에게 국가의 사죄와 재심을 권고했다. 다만 강우규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했다.

ⓒ인권의학연구소2015년 5월28일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강화옥씨 가족과 ‘강우규를 구원하는 모임’ 회원,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와 가족이 찍은 기념사진.
그해 10월 이오생·김성기·이근만씨와 고인이 된 강우규·강용구·김추백의 가족이 재심을 신청했다. 진화위의 진실 규명 판단과 재심 권고가 나온 이상, 강우규 가족을 빼면 쉽고 빠르게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재심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강우규 가족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다. ‘주범’인 강우규의 무고를 밝히지 않으면 사건의 전모는 물론 역사적 함의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김호정씨가 다른 피해자들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김호정의 노력과 진심은 강화옥의 마음도 움직였다. 아흔 살의 강화옥은 이미 고인이 된 남편보다는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재심을 하기로 결심하고 재판을 하자면 건강해야 한다며 매일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무죄판결로 마음속 빚을 덜어내고

2016년 6월9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강우규·강용구·김추백·이오생·김성기·이근만의 무죄를 확정했다. 앞서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의 김상환 부장판사는 눈물을 흘리며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피해자들은 재심을 시작하고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6년 동안 무죄판결과 더불어 얻은 게 있다. 간첩 사건을 조작한 국가권력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 마음속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극복한 것이다. 2014년 5월28일 재심 첫 공판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흔네 살의 강화옥·딸 강국희, 그리고 노인이 되어버린 한국의 피해자들이 처음 대면했다. 이때만 해도 이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강화옥·강국희가 다른 피해 생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자 피해 생존자들은 강우규를 원망한 날이 많았다고 했다. 이후 5회의 공판과 선고 과정에서 서로의 진술을 듣고 함께 울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 괴로워했던 이들은 서로가 안고 살아온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보듬게 되었다.

재심 재판은 피해자 가족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해하는 과정이자 사건을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간첩으로 조작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사건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강우규의 막내아들 강상균씨는, 재심을 통해 어머니나 누나들은 물론 다른 피해자들의 심정과 사건의 전모와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열심히 구명운동을 한 일본인들에게 무죄판결은 자신들이 청춘을 바친 운동이 결실을 맺는 것이었다.

강화옥 할머니는 이번 고향 방문을 두고 “좋은 꿈 같다. 100살이 되면 다시 고향에 갈 거야. 아버지·어머니 묘에 또 갈 거야”라고 말했다. 강화옥의 침대 옆에는 9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고향 마을 범섬 앞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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