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옥의 남편 강우규는 열여섯 살에 고향 제주도 중문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고 한국의 정세가 불안해서 일단 귀향을 포기했다. 그래도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살리라는 꿈을 꾸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꿋꿋하게 살았다. 1972년 같은 제주 출신인 지인이 서울에 ‘대영플라스틱’이라는 회사를 만들자 감사역을 맡았다. 남은 생을 조국 땅에서 살기 위한 준비였다.
그때부터 서울과 제주도를 다니던 강우규는 1977년 1월 한국에 갔다가 연락이 끊기고 사라졌다. 두 달 뒤인 3월24일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의 주범으로 한국 신문 1면에 등장했다. 이 사건은 일본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해 6월 1심, 11월 2심, 이듬해 2월28일 대법원 판결까지 거쳤지만 강우규의 간첩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강우규 가족이 뜻하지 않게 사건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2009년 10월이다. ‘주범’인 강우규와 만나지 않았으면 ‘간첩’이 되지 않았을 사람이 10명 있었다. 그중 1979년 뇌출혈 증상으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석방되었다가 곧 세상을 떠난 김추백의 딸 김호정씨가 강우규 가족을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던 김호정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낙심했다. 그때 필자와 김씨가 만나게 되었고, 필자는 30여 년 전 일본의 ‘강우규를 구원하는 모임’에서 만든 뉴스레터와 사건의 조작을 증명하는 보고서 등을 전해줬다. 그녀는 자료들을 읽으면서 제주도에서 태어난 강우규는 왜 재일조선인이 되었으며, 왜 고향을 방문했다가 간첩으로 조작되어야 했는지 궁금해졌다며 필자에게 강우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강우규가 고인이 된 후 모든 것을 잊고 지낸 가족들로서는 강우규의 진술 때문에 구속되어 목숨까지 잃은 피해자의 딸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강우규의 삶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김호정씨에게 가족들은 마음을 열었다. 2010년 1월 강화옥과 가족들은 진화위의 조사관이 일본으로 조사를 하러 왔을 때 적극 협조했고, 그해 5월 진화위는 ‘재일동포 실업인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에게 국가의 사죄와 재심을 권고했다. 다만 강우규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했다.
무죄판결로 마음속 빚을 덜어내고
2016년 6월9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강우규·강용구·김추백·이오생·김성기·이근만의 무죄를 확정했다. 앞서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의 김상환 부장판사는 눈물을 흘리며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피해자들은 재심을 시작하고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6년 동안 무죄판결과 더불어 얻은 게 있다. 간첩 사건을 조작한 국가권력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 마음속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극복한 것이다. 2014년 5월28일 재심 첫 공판 전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흔네 살의 강화옥·딸 강국희, 그리고 노인이 되어버린 한국의 피해자들이 처음 대면했다. 이때만 해도 이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강화옥·강국희가 다른 피해 생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자 피해 생존자들은 강우규를 원망한 날이 많았다고 했다. 이후 5회의 공판과 선고 과정에서 서로의 진술을 듣고 함께 울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해와 피해의 구도에 괴로워했던 이들은 서로가 안고 살아온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보듬게 되었다.
재심 재판은 피해자 가족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해하는 과정이자 사건을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간첩으로 조작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사건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강우규의 막내아들 강상균씨는, 재심을 통해 어머니나 누나들은 물론 다른 피해자들의 심정과 사건의 전모와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열심히 구명운동을 한 일본인들에게 무죄판결은 자신들이 청춘을 바친 운동이 결실을 맺는 것이었다.
강화옥 할머니는 이번 고향 방문을 두고 “좋은 꿈 같다. 100살이 되면 다시 고향에 갈 거야. 아버지·어머니 묘에 또 갈 거야”라고 말했다. 강화옥의 침대 옆에는 9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고향 마을 범섬 앞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
간첩조작 사건, 그로부터 40년
간첩조작 사건, 그로부터 40년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관련 기사‘간첩 조작’으로 옥살이한 재일동포 피해자들 2015년 11월22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11·22 시민집회-재일 한국인 정치범과 재심 무죄판결의 의미를 생각하다’에 간...
-
화가를 고문한 그들, 몽타주를 남기다
화가를 고문한 그들, 몽타주를 남기다
김선수 (법무법인 시민·변호사)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출범했다. 민변 창립 멤버인 김선수 변호사는 노동·인권·공안 사건 등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법정에서 변론을 해왔다. 〈시사I...
-
어버이연합 게이트에 청와대·국정원은 ‘오리발’
어버이연합 게이트에 청와대·국정원은 ‘오리발’
김연희 기자
4월26일 서울시 종로구 인의동에 위치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사무실은 어수선했다. 식당 겸 사무실로 사용하는 2층 문에는 한자로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쓰인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
이제사 고람수다 [편집국장의 편지]
이제사 고람수다 [편집국장의 편지]
고제규 편집국장
서명숙 이사장, 안은주 상임이사 등 한솥밥을 먹은 선배들이 만든 제주올레. 호평이 많아 내가 다 뿌듯했다. 정작 개장 9년이 되도록 제대로 걷지 못했다. 뒤늦게 지난해부터 걷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