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 때 고향 대구에서 향토 음식과 술을 잔뜩 먹고 페이스북에 호기로운 일필휘지를 남겼다. “대구야말로 풍미의 고향. 전주와 광주, 함께 덤벼라!” 호기가 지나쳤던 모양이다. 홍소(哄笑)로 가득한 댓글이 줄을 잇는 가운데 ‘대구에서 대구탕을 먹었는데 끔찍했다’라며 놀리는 분이 있었다. 그 순간, 한 인물이 떠올랐다. 김학철이라는 혁명가 겸 작가다.

ⓒ시사IN 양한모

김학철 선생은 보성고보 재학 시절인 19세 때(1938), ‘나라를 되찾자’라는 뜨거운 마음 하나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우연찮게 아나키스트 테러 단체인 의열단을 거치며 늦깎이 사회주의자가 되어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중국 허베이성 태항산 전투에서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그는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이런 역정을 익살스럽고 따뜻하게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 바로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이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좌익 정치 활동을 벌이다 월북했다. 〈노동신문〉과 〈인민군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김일성을 비판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중국도 안식처는 아니었다. 마오쩌둥 체제를 비판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적발되어 문화혁명기의 10년을 감방에서 지냈다. 사회주의자로서 자부심을 지켰던 선생은 삼엄한 인민재판에도 당당하게 맞섰다. 1980년, 65세의 나이로 석방되었다.

1990년대 초, 서울에 온 선생에겐 “40여 년 만에 한번 먹음으로써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고자 했던 음식이 있다. ‘대구탕’이다. 서울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식당에 갔는데, 그 ‘생선 대구로 끓인’ 대구탕은 선생이 꿈꾸던 음식이 아니었다. 선생의 대구탕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행했던 ‘경상도 대구식으로 끓인 매운 장국밥’이었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를 읽었을 때 대구의 향토 음식인 ‘따로국밥’을 떠올렸다.

2001년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 중인 선생을 직접 뵙는 행운을 누렸다. 석 달쯤 뒤,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다가 그의 부고(기일은 9월25일)를 발견했다. 향년 85세. 선생에게 대구식 장국밥인 대구탕을 끝내 대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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