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5일,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췌장암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뒷모습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 그가 회복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극적으로 떠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10월5일은 당시 애플 신작인 아이폰 4S가 공개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 공교로운 날짜는 잡스를 둘러싼 신화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됐다. 오랜 세월 혁신가·사기꾼·장사치·마케팅 천재·애플 그 자체로 군림했던 시대의 아이콘은, 자신의 동료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이 없는 애플의 첫 프레젠테이션을 확인한 뒤에야 오랜 짐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들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시나리오인가.

의도한 적 없으나 극적으로 맞아떨어진 타이밍 탓에, 스티브 잡스를 애증했던 수많은 이들은 ‘4S’의 의미가 ‘포 스티브(For Steve)’가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S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S의 정체는 스티브 잡스가 인수해 iOS에 탑재한, SRI사의 인공지능 음성인식 비서인 ‘시리’의 머리글자다. 시리는 그 이후에 등장할 모든 스마트 디바이스의 조작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신호탄이었다.

ⓒ이우일 그림
시리 이전에도 스마트폰에 탑재된 음성인식 프로그램은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명령어를 입력하듯 제한적인 문장들만 알아듣는 데 그쳤던 기존 음성인식 프로그램과 달리, 시리는 자연어를 처리할 줄 알았다. 시리를 처음 시연하는 무대 위에서 iOS 개발 담당 스콧 포스톨은 “내일 날씨는 어떠니?”라는 문장뿐 아니라, “내일 우산이 필요할까?” “외투를 들고 가야 할까?” 같은 문장으로 그게 날씨를 묻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내는 시리의 능력을 자랑했다. 시리는 사용자가 한 말의 맥락을 파악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줄 아는 첫 음성인식 비서 프로그램이었다.

처음부터 시리가 아이폰을 위해 개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국방부의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스탠퍼드 대학 연구진들이 세운 회사 SRI는 시리를 개발했고, 이는 안드로이드와 블랙베리용 앱으로 발매될 예정이었다. 애플이 시리를 인수하며 상황은 흥미로워졌다. 애플은 시리를 단순한 앱으로 개발하는 대신 운영체계의 일부로 흡수해버렸고, 사용자들은 홈 화면에서 앱 아이콘을 찾아 누르는 대신 홈 버튼을 지그시 누르는 것만으로 시리를 불러낼 수 있었다.

누구나 스마트폰의 핵심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니, 얼마나 근사한가

이게 별 차이가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2011년 애플이 시리를 발표하며 공개한 프로모션 영상을 보자. 시각장애인 여성에게 문자가 오자, 시리가 알아서 문자 내용을 읽어준다. “새 문자 알림입니다. 샌디 챙으로부터. ‘우리 오늘 저녁 때 보는 거 맞지?’” 여자는 폰을 들어 홈 버튼을 누르고 말한다. “답장해. ‘물론. 이따 봐.’” 자신이 제대로 받아쓴 게 맞는지 확인하듯 문자 내용을 한 차례 읽어주는 시리의 목소리를 듣고, 여자는 웃으며 말한다. “전송해.” 장애 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나 스마트폰의 핵심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날씨와 알람, 일정 확인 및 조정, 문자 확인과 답신까지 간단한 몇 마디로 통제할 수 있는 시리는 인류가 스마트폰을 대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게임 체인저였다.

물론 시리가 후발 주자들보다 더 뛰어난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시리를 개발했던 프로그래머들이 삼성과 손잡고 만든 빅스비는 이미 여러 테스트에서 시리를 위협하거나 능가하는 성능을 보여줬고, “오케이 구글”이라는 명령어로 무장한 구글 어시스턴트 또한 시리의 라이벌이 된 지 오래다.

시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 디바이스와 소통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니 한 번쯤 시리를 불러 물어봐도 좋겠다. “시리야, 넌 생일이 언제니?” 시리는 답할 것이다. “저는 생일이 없어요. 비서로서 첫 출근일은 2011년 10월4일이었습니다.” 출근기념일을 축하해, 시리.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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