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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갔더니 감동이 있더라

<어 퍼펙트 데이>
감독: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출연:베니치오 델 토로, 팀 로빈스, 올가 쿠릴렌코, 멜라니 티에리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0월 10일 화요일 제5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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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말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모로 가야만 서울에 이른다(<한겨레>, ‘권혁웅의 오목렌즈’, 2015년 8월5일). 알 듯 말 듯한 이야기였는데 이제야 조금 알 듯도 하다. <어 퍼펙트 데이>를 보고 나니.

1995년, 3년을 넘긴 내전 탓에 땅도 사람도 황폐화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어느 마을. 누군가 우물에 던져놓고 간 시체를 빨리 꺼내지 않으면 마을 사람이 마실 식수가 심각하게 오염될 상황. 시체 끌어올릴 밧줄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는 NGO 활동가들의 하루가 영화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보내는 이들의 한나절은 긴박하지도 위태롭지도 않다. 그들은 매사에 시큰둥하고 영화는 매 순간 우스꽝스럽다.

공교롭게도 내가 기억하는 ‘발칸반도 내전 소재 영화’들이 모두 저마다의 우회로를 선택했다. <그르바비차>(2005), <노 맨스 랜드>(2001), 그리고 <비포 더 레인>(1995). 세 편 어디에도 잔혹한 학살 현장이나 치열한 전투 장면이 담겨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하나같이 모로 가는 영화. 전쟁의 지옥도를 구체로 재연하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만드는 이에게나 보는 이에게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세기말 발칸반도라는 시공간은, 매번 그렇게 모로 가야만 겨우 가 닿을 수 있는 목적지인지도 모르겠다.

<어 퍼펙트 데이>가 선택한 우회로는 반어법(아이러니)이다. 오늘 마을 사람들을 살릴 밧줄이 어제 마을 사람들을 죽인 바로 그 밧줄이고, 비가 오면 화장실이 넘쳐 고역이지만 비가 와야 우물이 넘쳐 타는 목마름을 달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는 주민을 돕는 구호 요원은 정작 전쟁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뒤늦게 전쟁에 개입한 유엔 평화유지군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 전투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러니. 하나에서 열까지 부조리. 이 영화가 모로 간 덕분에 비로소 관객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 모든 전쟁의 누추한 본질. 

유유자적하는 이 영화의 유머와 반어

“치유의 핵심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상성의 복원이다. 부당 해고를 당한 해고자들이 몇 년씩 한뎃잠을 자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예전의 평범한 일상이다. 퇴근길에 동료들과 삼겹살을 구우며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던 시간, 아이를 목말 태우고 봄꽃을 보여주던 순간, 그런 일상의 시간들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일상성이 확보돼야 다음 수순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다(<한겨레>, ‘이명수의 사람그물’, 2014년 3월31일).”

전쟁터에서 꿈꾸는 ‘a perfect day(완벽한 하루)’도 결국 ‘예전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은 하루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온종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하루. 연인끼리 밤새 말다툼하는 하루. 그냥 그래도 되는 하루.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내는 것과 비슷한 하루. ‘그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일상성이 확보돼야 다음 수순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 더욱 간절한 하루. 그 ‘완벽한 하루’의 동선을 따라 유유자적하는 이 영화의 모든 유머와 언쟁과 반어와 역설이 난 좋았다. 완벽한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로 더할 나위 없는 라스트 신이 난 참 좋았다. 마지막까지 모로 가는 영화라서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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