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린 지 어언 삼십 년’으로 시작해서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로 마무리되는 이 노래는 일생 동안 성실하게 나라를 지켰던 군인의 소회를 담담히 그려냈지. 이 노래 중에는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라는 가사가 있어. 그와 비슷한 실제 사연 하나를 아빠는 아프게 읽은 적이 있다.

어느 군인의 어린 딸은 플루트 배우기를 애타게 바랐다고 해. 플루트 사달라고 조르는 딸을 무릎에 앉혀두고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물어. “비단 장수 왕 서방이라고 아니?” 비단 장수 왕 서방은 비단 팔아 돈 잘 버는 사람이며 아빠는 돈 잘 못 버는 군인임을 주지시킨 뒤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플루트를 꼭 사달라고 조르면 아빠가 군인을 그만두고 비단 장수를 해서 돈을 벌어 사줄 수 있어. 그렇게 해줄까?” 나이 어린 딸이었지만 이 질문 앞에서는 “그냥 아빠 군인 하세요”라고 대답하고 말았다는구나(〈월간조선〉 2000년 7월호 ‘그날 새벽 4시에 찾아온 남편의 마지막 당부’).

ⓒ연합뉴스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박흥주 대령.
그는 10·26 사건 연루자들 중 가장 일찍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까칠한 아버지는 박흥주 대령(1939 ~1980)이야. 그러고 보니 네 할아버지와 동년배구나. 명문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할 만큼 공부를 잘했던 그였지만 가정 형편상 육군사관학교를 택했지. 육사 18기. 하지만 그는 타고난 군인이었다고 해. 모든 면에서 동기들보다 뛰어났고 “미래의 육군 참모총장감”이라는 찬사를 사방에서 들었다지. 포병 장교로 6사단에 근무하던 시절 그의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나게 돼. 사단장 김재규였지. 박정희 대통령의 제자이자 후배였고 후일 중앙정보부장으로 중용됐다가 끝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던” 10·26 사태를 일으킨 주인공.

여담이다만 유신 시대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여학생들의 회고담으로 화제가 된 책 〈영초 언니〉(서명숙, 문학동네 펴냄, 2017)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등장한다. 데모하다가 감옥에 간 여학생(서명숙 현 제주올레 이사장)은 사기 혐의로 들어온 한 ‘장군의 부인’을 만난다. 그런데 어느 날 덜컥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그 소식에 대성통곡을 하던 ‘장군의 부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이가 다름 아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소식에 안면을 바꾸었다고 해. “김재규 장군이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그녀는 나를 가까이에 불러 앉혀놓고 김 장군이 군 시절 얼마나 참된 군인이었는지 내게 조목조목 들려주었다.”

감옥에 들어온 사기꾼에게도 ‘남편의 옛 상관’으로 존경받았던 강직한 군인 김재규는 유능하고도 인품 좋아 보이는 청년 장교를 콕 찍었고, 부대를 옮길 때마다 데리고 다니다시피 함께 근무했어. 전역 후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김재규는 1978년 4월, 팀스피리트 육군 담당 장교로 복무하던 박흥주 대령을 호출한다.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1년6개월 뒤 박흥주 대령은 앞서 말했듯 10·2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폭풍 같은 사건 한가운데 서게 돼. 김재규 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쏠 총을 건넨 사람이 바로 박흥주 대령이었단다. 이윽고 그는 체포돼 감옥에 갇힌다. 군인으로서 그의 진가는 그때 여실히 드러나게 돼.

잘나가는 육군 대령에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가 다시 날려 보낼 위세를 자랑했던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이라면 정원이 딸린 저택 몇 채를 가졌더라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어. 박흥주 대령은 자동차도 못 들어갈 산동네의 열두 평짜리 집에 살았어. 그렇게도 ‘잘나가는’ 사람이었건만 그 형제들이건 친구들이건 박흥주 대령 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대통령 ‘시해범’의 집에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 박흥주 대령의 딸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고사리손으로 쓴 플래카드를 내보였어.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플루트를 사달라는 딸에게 “아빠가 나라 지키는 군인 그만두고 비단 장수 할까?”라며 을러대던 고지식했던 아버지는 군인이었기에 항소 없이 단심제로 재판이 끝나버렸지. 판결은 사형. 박흥주 대령이 두 딸에게 남긴 편지를 읽다 보면 눈물이 핑 돌다가 결국은 봄날 고드름처럼 뚝뚝 떨어지고 말아.

ⓒ한국일보두 딸이 기자들 앞에서 ‘박흥주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선처를 호소했다.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를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미래의 육군참모총장’감이었던 그는 왜 그런 엄청난 ‘선택’을 했고 사랑하는 딸들과 이별해야 했을까. 위에 인용했던 기사를 보면 약간의 힌트가 보인다. 1979년 부산과 인근 마산에서는 거대한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어. 유신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에 맞섰고, 이를 텔레비전에서 지켜보던 박흥주 대령의 아내가 “중앙정보부가 저런 일 수습하지 못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해. 그때 박 대령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1979년 당시 박 대통령은 광기와 탐욕에 사로잡힌 독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유신헌법을 ‘비방’만 해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시행 중이었고 제1야당 총재가 국회에서 쫓겨났으며 대통령의 지근거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이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을 죽였는데 까딱없었습니다. 탱크로 깔아뭉개 버립시다”라고 속삭이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자신도 “서울에서도 시위가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지. 10·26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특히 박흥주 대령을 살리려고 애썼어. 자신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으며 모범적이고 결백한 사람이니 극형만은 피해달라고. 박흥주 대령이 단지 상관의 ‘명령’ 때문에 그 엄청난 일에 가담했을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거사 당일 박흥주 대령에게 계획을 털어놓았어. 그러고는 박흥주 대령에게 나지막한 한마디를 남겼다고 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어쩌면 그 한마디가 박흥주 대령의 행동을 결정했는지도 몰라. 그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었고 광기와 탐욕에 눈이 먼 독재자의 수족이 아닌, 인간의 존엄함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의무를 지닌 군인이었으니까. “(정권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던 군인이었으니까. 단지 ‘상사의 명령에 따르기만’ 한 행동이 아님을 그는 아내에게 남긴 유서를 통해 증명해.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들을 위해 할 말을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알 것은 다 알게 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도와줄 겁니다.”

유능한 군인, 그에 더하여 진귀할 만큼 청렴한 무인(武人)이었고 국민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독재에 항의했고 딸들에게 당당한 아빠였고 아내에게 존경스러운 남편이었던 박흥주 대령의 유언 앞에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당당할까. 그 후 우리 역사는 그들 앞에 떳떳할까? 아빠는 대답하기 어렵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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