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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MBC 라디오 빨리 만날 수 있기를…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파업에 돌입하면서 MBC 라디오가 정규 프로그램을 멈췄다. 노동의 동무, 생활의 활력, 유머의 반면교사였던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들을 수 없다.

김현 (시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0월 02일 월요일 제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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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자주 듣는다. 출퇴근할 때도 듣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할 때도 듣는다. 라디오는 때때로 시계 대신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고 지금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귀띔해주기도 하며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아무래도 모르겠는 이들을 위해 ‘몇 대 몇’ 여론조사를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라디오의 진짜 재미는 사연 듣는 재미. 다른 사람은 지금 어찌 사는가, 사연을 들을 때면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귀 기울이게 되고 서성이게 되고 흔들리게 된다. 사연 뒤에 맞춤한 신청곡이라도 흘러나오면 점입가경. 첫사랑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더라는 사연 뒤에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같은 노래가 들릴라치면 괜스레 우수에 젖고, 추억의 한 자락을 소환하다가 지레 놀라기도 한다. 언제 이렇게 늙었는가. 하지만 진짜는 그다음. 신청곡이 끝나고 디제이가 방금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소개한다. “보톡스 맞았을 거예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아도 라디오의 사연과 그 사연 뒤에 이어지는 사연은 ‘인생이 뭘까’라는 의문보다 ‘인생 뭐 있나’라는 느낌을 남긴다. 라디오는 보고 즐길 때와는 또 다른 문장부호를 듣는 이에게 남긴다.

ⓒ시사IN 윤무영
9월4일 MBC 라디오가 정규방송을 멈췄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총파업에 라디오 PD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김범영씨가 종종 어젯밤 들었다며 손글씨로 적어 전해주던 <유영석의 FM 인기가요> 클로징 멘트는 그 시절 청소년에게 사색할 거리를 확보해주는 줄임표 같은 것이었고, 군대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내무반으로 들어와 몰래 듣던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 박스>는 그날 얼차려의 악몽에 쉼표 같은 걸 찍어주었다.

1만 회를 넘긴 방송을 멈추게 한 이유

이런 순간은 또 어떤가. 최근 버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운전 기사분이 볼륨을 크게 높여두어서 버스 전체에 라디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객들 대부분이 (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라디오에서 ‘난 알아요’가 흘러나왔다. 버스의 공기가 일순 달라지고 그 유명한 전주가 끝나갈 때 마치 노래방 화면의 3, 2, 1을 보기라도 하듯 승객 몇이 발로 박자를 구른 후 동시에 읊조렸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어제의 버스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오늘의 버스에서 벌어지고, 어제는 예기치 못했던 일을 오늘은 예기치 못하게 하게 된 셈. 라디오를 듣는 일은 그러니까 다소 빤한 듯 보이는 하루의 줄을 바꾸고 그날 일과를 새로이 쓰게 한다.

얼마 전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클로징 멘트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저는 사실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간절히 바라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을 빨리 만날 수 있기를. 다시 만나도 좋은 방송. MBC 문화방송….” 실은 연속방송 프로그램 최초로 1만 회 방송을 맞이한 프로그램이 이렇게 멈추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공영방송 정상화 및 김장겸 사장 퇴진을 외치며 총파업에 돌입하고 이에 MBC 라디오 PD 및 라디오 작가들이 총파업 지지를 선언한 일은 예상 가능했다. 갑자기 방송에서 특정 연예인, 아나운서, 기자들이 사라지고 방송이 일부 세력의 사유물로 전락해 편파 왜곡 방송이 이어지던 것을 나도, 우리도 보았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블랙리스트가 있고 ‘건전 성향’이라는 명목하에 프로그램에 대한 검열이 가해졌으며 노조 탄압을 주도한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슬슬 드러나고 있다.

27년 동안 디스크자키 배철수의 시원섭섭한 유머를 들어왔던 이들은 그를, 그의 방송을 노동의 동무, 생활의 활력, 유머의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 어떤 방송은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을 전해주는 ‘수첩’ 같은 것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한때 라디오 작가가 되어볼까 고민했다. 지금은 청취자로서 들여쓰기 하듯 응원하고 싶다. 우리가 이긴다. 걱정 말고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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