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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레’와 바다의 신사

여기 한 부자(父子)가 있다. 아버지 손정도 목사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동포를 도우며 살겠다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아들 손원일 제독은 해방 이후에 조선의 바다를 지킬 해군을 건설하는 데 매진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26일 화요일 제5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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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인력이 달린 일본은 조선 청년들을 대거 전장으로 끌고 갔어. 징집된 조선 청년이나 일본군 장교가 된 조선인은 대개 육군이었지. 일본 해군도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조선인을 징집하지만, 군함에 태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장교는 전무하다시피 했어. 첨단 기술을 운용해야 하는 해군 특성상 조선인을 받지 않았다고도 하고, 한 배에 탄 이상 함께 살고 함께 죽어야 하기에 조선인을 끼워넣기 꺼려했다는 설도 있어. 이유야 어쨌든 일본 해군으로서 전투를 치르거나 해전(海戰)을 지휘해본 조선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얘기지.   

해방이 왔다. 새 나라의 군대를 건설하던 무렵 육군은 그 출신들이 형형색색이었어. 광복군을 비롯한 독립군, 중국군에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 일본군 출신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으니까. 해군은 달랐어. 위에서 언급했듯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해군 창설은 지극히 ‘자주적’인 손길로 이뤄졌지. 그 중심에 손원일 제독(1909~1980)이 있었어.

ⓒ흥사단
1920년 도산 안창호의 생일 기념으로 함께 사진을 찍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오른쪽).

먼저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에 대해 짧게 소개할 필요가 있어. 지금 북한을 통치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가 손정도 목사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그는 만주로 옮겨 활동하던 중 중학교 선배의 아들이 독립운동 혐의로 감옥에 갇힌 것을 알고 발 벗고 나서서 그를 구해줘. 바로 그이가 김일성이었어.

손정도 목사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해. “비단옷은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 우리 역사에 폼 나는 비단 깃발로 사람들 앞에 나부끼고파 안달했던 사람들은 참 많았다. 반면 걸레처럼 후미진 데를 닦고 더러운 것을 털어내면서 헌신한 사람들은 그보다는 적었지. 손원일은 조선의 ‘걸레’를 자임하며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단다.

그는 바다를 좋아했어.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할 생각도 하지만 워낙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듣고는 민간 상선의 항해사가 돼.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수만 톤급 화물선 운항 경험도 쌓았던 그는 광복을 맞은 조선의 바다를 지킬 해군을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해방되자마자 귀국한 그는 8월21일 그러니까 해방되고 엿새 뒤 몇몇 동료와 함께 풀 통을 들고 길거리를 돌며 영화 포스터 붙이듯 벽보를 붙이기 시작해.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이렇게 모인 동료가 70명에 이르렀고 미군정의 승인을 얻어 1945년 11월11일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조직하게 돼. 오늘날에도 이날은 우리 해군 창설일로 기념되고 있어. 이 날짜를 출범일로 정한 건 손원일이었어. 그는 “해군은 바다의 신사(紳士)”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십(十)과 일(一) 두 글자를 합치면 선비 사(士)가 된다는 뜻에서 11월11일을 창설일로 정했다는구나.  

이 70명은 의기양양 일본 해군 기지가 있던 진해로 내려갔으나 무진장 고생이 많았어. 진해의 미군 지휘관이 “나는 연락받은 바 없소!” 하며 딴전을 피우지를 않나, 보급품도 없고 제대로 된 지원도 없는 상태에 지쳐버린 동지들이 조직을 이탈해 돌아가지를 않나, 정말로 그 시작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지. 하다못해 군가조차 제대로 없어서 일본군 군가에 우리 말 가사를 얹어 부를 정도였으니까. 그때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만든 노래 <바다로 가자>는 지금껏 해군의 영혼 같은 노래로 남아 있어.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월급을 갹출해 사들인 첫 전투함 ‘백두산함’

바다로 가고 싶어도 배가 있어야 가지 않겠니. 신생 독립국의 가난한 사정은 함포를 장착한 군함 한 척 장만하기도 쉽지 않았지. 한국군 최초의 장성 중 하나가 된 손원일 제독은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본인이 위원장을 자임한다. 그러고 나서 월급을 갹출하기 시작했어. 장교는 10%, 병조장은 7%, 하사관 수병은 5%를 매달 봉급에서 제했다고 해. 해군 장교와 병사들의 부인들도 바느질을 하고 수공예품을 팔고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았어. 그렇게 넉 달 동안 1만5000달러를 모아. 이 돈에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내준 정부 보조금을 보탠 6만 달러로 한국 해군은 첫 전투함을 산다. 그게 ‘백두산함’이었어. 이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후 후방에 침투하려던 공산군 유격대를 태운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지.

ⓒ백범기념관 제공
1946년 9월 진해 조선해안경비대를 방문한 백범 김구(앞줄 가운데).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손원일 제독.

한국 해군과 해병대는 성장해갔고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은 그 선두에 있었단다.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 섬들을 점령했던 이들은 해군이었고, 해병대는 서울 탈환의 선봉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는 감격을 연출하기도 했어. 이 밖에도 손원일 제독의 활약상은 많겠지만 아빠가 네게 얘기해주고픈 손원일 제독 최고의 순간은 따로 있어.    

그는 부하들에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고 해. “첫째, 장병들을 구타하지 말라. 둘째, 포로와 부역자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 셋째, 명령 불복종, 도망 장병 등 위법자는 즉결처분하지 말고 군법에 회부하여 처리하라(<손원일 제독> 오진근·임성채 공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뺨 때리는 걸 능사로 알던 일본군의 악습을 혐오했던 독립투사의 아들로서 손원일 제독은 한때 좌익에 관계했다는 이유로 멋도 모르는 농부들까지 죄 잡아 죽였던 학살의 광풍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쓴 군인이었어. 자기 차를 추월했다는 이유로 추월한 트럭 운전병을 쏘아 죽이는 장군이 출세 가도를 달렸던 한국군의 현실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고 우뚝 솟았던, ‘국민을 지키고 부하를 아낄 줄 알았던’ 군인이었던 거야. 서울 수복 후 처음 내린 포고령도 “공산군에 협력했을지라도 북으로 도망하지 않은 사람은 죽이지 말라”였고 임시 수도 부산으로 달려가 대통령에게 수복 보고를 하면서도 부역자에 대한 관대한 처리를 탄원했어. 이승만 대통령은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 같지만.

전쟁 중 손원일 제독에게 부역자 400여 명이 맡겨진 적이 있어. “빠른 시일 내에 처형하라”는 은밀한 지시와 함께. 손 제독은 비밀리에 그들을 배 수리 공장에 투입했지. 그러자 또 다른 요청이 왔어. “우리가 총살할 테니 인계하시오.” 손 제독은 이를 단호히 거절해. “죽여도 내가 죽일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시오.” 이후 손 제독은 순차적으로 그들을 석방했고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었던 400명은 다시금 생을 이어가게 됐던 거야.

용맹한 군인은 많았어. 그러나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에게까지 그 ‘용맹’을 발휘한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적에게는 고양이였던 주제에 자신이 보위해야 할 국민들의 생명에 호랑이 송곳니를 박아넣었던 군인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우리 군(軍)이 기억해야 할 역사야. 그래서 손원일 제독의 존재는 더욱 찬란해. 해군을 만들기 위해 맨주먹으로 풀 통 들고 다니며 동지들을 모집했던 결기와 전쟁에서 보여준 눈부신 전공에 더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위협하는 명령에 정면으로 맞섰던 바다의 신사로서 보여준 용기까지. 우리에게도 그런 군인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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