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맑음, 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
오지혜 지음
안나푸르나 펴냄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례는 무례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권력이 타자를 괴롭히는 데 쓰인다면 우리 모두가 지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그(트럼프)가 일깨워주었다.” 트럼프가 장애인을 조롱하는 언사를 보인 것 등을 두고 배우 메릴 스트립이 한 말이다. 배우 오지혜씨는 “내가 그녀를 존경하는 건 지구에 현존하는 배우 중 연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문화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항상 보여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메릴 스트립의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그녀는 스크린에서, 공영방송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라졌을 테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권력은 누구 혹은 특정 정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예술인들을 배제하려 했다. 개그맨 황현희씨는 ‘내 이름이 왜 블랙리스트에 들어갔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혹시 〈시사IN〉 창간 당시 홍보대사를 해서인가에까지 생각이 다다랐다고 한다(〈시사IN〉 기자로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방송과 무대에서 밀려나고 배제되는 과정은 음지의 블랙리스트만큼이나 은밀했으리라. 무참한 일이다.

배우 오지혜씨도 ‘MB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에 진보 정당을 지지한 게 이유로 꼽힌다. 오씨가 쓴 에세이 〈날씨 맑음, 오늘도 여행 같은 하루〉를 읽었다. 그녀가 만난 예술가들, 독서 풍경, 여행 이야기 등을 담았다. 글의 내용과 톤은 블랙리스트라는 차가운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연기를 업으로 삼은 이의 소소한 일상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세월호에 대해 쓴 글이 여러 편인데, 이 땅의 시민이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떨림과 슬픔이 묻어난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모진 세상을 견디는 양심. 그게 블랙리스트의 이유라면 이유겠다. 지난 시절을 어찌 되돌릴 수 있으려나.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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