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4일 실시되는 독일 총선을 앞두고 9월3일 기독민주당(기민당) 메르켈 총리와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사민당) 대표 사이 텔레비전 토론이 있었다. 텔레비전 토론은 이번 한 번뿐이다. 슐츠 대표가 두 차례 텔레비전 토론을 요청했지만 메르켈 총리가 거부했다. 9월3일 밤 8시15분부터 97분간 이뤄진 토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거대 양당 후보 둘만 출연해 ‘맞짱 토론’을 벌인다.

지지율에서 열세인 슐츠 대표가 총리 후보로 텔레비전 토론에 나서는 건 처음이다. 사민당에서는 1998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올랐던 슈뢰더(1998~2005년)가 마지막 총리였다. 절치부심한 사민당과 슐츠 후보는 텔레비전 토론을 발판 삼아 역전을 노렸다. 경쟁자인 메르켈 총리는 2005년, 2009년 텔레비전 토론 때 말실수를 하는 등 ‘대량 실점’을 한 경력도 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4선에 도전하는 메르켈 총리는 이번 토론에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AFP PHOTO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와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 대표가 텔레비전 토론 뒤 여론조사에서 메르켈 총리가 우세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토론 후 공영방송 ZDF 여론조사에서 메르켈 총리가 잘했다는 응답 비율이 32%로 29%인 슐츠 대표를 근소하게 앞섰다. 독일 공영방송 ARD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그 격차가 더 벌어졌다. 55%가 메르켈 총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슐츠 대표를 높이 평가한 응답자는 35%에 그쳤다. 이번 토론을 통해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은 총선 승리에 바짝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주간지 〈슈피겔〉은 메르켈 총리가 슐츠 대표를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가 토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보도했다. 메르켈 총리에 비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적었던 슐츠 대표가 토론 준비를 잘했고, 여러 지점에서 날카롭게 공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럽의회 의장을 맡았던 슐츠 대표가 충돌보다는 협상과 타협에 익숙한 게 토론 때 약점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승부를 떠나 두 당의 연정 가능성을 점치는 분석도 나왔다.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여러 지표가 대연정을 가리키고 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토론을 통해 드러난 기민당과 사민당의 정책 노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도 텔레비전 토론에서 이처럼 많은 ‘덕담’이 오간 적은 드물었다고 전했다. 메르켈 총리는 슐츠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두 후보자의 토론 태도에 대해 이 신문은 “토론이 끝날 즈음에 시청자들은 메르켈이 과연 슐츠에게 반대할 생각이 있는지, 혹시 기민당과 사민당이 연정 계획을 광고하는 자리로 토론을 이용한 건 아닌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유권자 관심사인 ‘사회정의’ 논의 안 돼

독일 언론은 토론에서 다뤄진 주제들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토론 시간 대부분이 난민 문제, 유럽 이민법, 안보 분야에 할애되었다. 슐츠 대표는 2015년 난민 위기 때 다른 유럽연합 국가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무리하게 국경을 개방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메르켈 총리는 “총리로서 긴급하게 결정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라고 응수했다. 슐츠 대표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공방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난민이나 외교 문제에서 메르켈 총리와 슐츠 대표 사이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다고 대다수 언론은 지적했다.

교육·의료·기후변화 정책·극우주의 등 세부적인 주제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특히 유권자 37%가 중요하다고 여긴 ‘사회정의’와 관련된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실업급여 수령 기간 연장과 계약직 근로조건 강화 등 사회정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사민당과 슐츠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Reuter텔레비전 토론이 진행되는 방송사 앞에서 응원하고 있는 메르켈 총리 지지자들.

ⓒAFP PHOTO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 대표 지지자들.

독일 신문 〈빌트〉가 9월1~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기민당은 36.5% 지지를 받아 23.5% 지지에 그친 사민당을 크게 앞섰다. 2016년 11월 메르켈 총리는 네 번째 출마 선언을 하며 이번 선거가 통일 이후 가장 어려운 선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올해 초까지만 해도 선거 판세가 기민당과 메르켈 총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민당은 곧 지지율을 회복했다. 사민당은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슐츠 대표가 메르켈 총리와 동등한 총리 경쟁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두 후보 간에 선명한 차이가 부각되지 않은 이상 사민당의 역전은 쉽지 않으리라 보인다.

독일 정당들은 극우 정당이나 트럼프 대통령 규탄에는 한목소리를 낸다. 대안을 제시하는 차별화된 선거 캠페인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간지 〈자이트〉는 “기본소득이나 애플과 구글 등 미국 기업이 유럽에서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등 용기 있는 선거 구호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9월4일 있었던 소수 정당 대표가 참여한 텔레비전 토론회가 거대 정당의 토론보다 치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녹색당, 좌파당, 기독사회당(기사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독일대안당), 자유민주당(자민당) 대표가 참석했다. 난민 송환에 대해 자라 바겐크네히트 좌파당 대표는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말했지만 크리스티안 린드너 자민당 대표는 “체류 허가가 없는 사람은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의 알리체 바이델 대표는 “한 해 수용 가능한 난민 수를 1만명으로 제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소수 정당 토론회는 주제도 다양했다. 난민 정책뿐 아니라, 주거·국내 안보·디지털 정책 등 폭넓은 분야에서 각 당 대표가 충돌했다. 기사당을 제외한 나머지 소수 정당은 10%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정당들은 강한 야당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독일대안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모두 기민당 혹은 사민당과 연정할 수 있는 파트너로 여겨진다. 올해 상반기에 비해 사민당 지지율이 떨어짐에 따라 가능성은 다소 낮아졌지만 사민당-좌파당-녹색당 연정 가능성은 오랫동안 언급돼왔다.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의 의회 진출이 유력해지면서 우파 정당인 기민당과 중도 우파인 자민당의 보수 연정도 현실성 있는 조합으로 떠오르고 있다. 녹색당이 보수당과의 연정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기민당-녹색당 연정, 혹은 기민당-자민당-녹색당 연정도 가능한 조합이다. 메르켈과 슐츠 사이 ‘덕담’이 오간 이번 텔레비전 토론을 계기로, 기민당 연합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지속되리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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