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8월8일. 그날 이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상흔이 마음에 남았다. 그날 아침, 정원과 연못이 있는 KBS 야외 스튜디오 선큰가든에서 〈생방송 세상의 아침〉을 무리 없이 마쳤다. 나는 중계차에서 중계 시스템과 영상을 담당하는 방송기술직이다. 선큰가든에서 생방송을 하다 보면 가끔씩 MC 뒤로 강렬한 햇살의 역광이 생겨 영상을 담당하는 방송기술직들의 마음을 졸아들게 만드는데, 그날 아침 생방송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방송을 마치고 ‘나의 애마’ 중계 8호차를 뒤로하고 주린 배를 달래러 본관 식당으로 향했다.

KBS 앞 ‘민주광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고픈데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본관 주위에 경찰 버스가 보여 민주광장 쪽을 내다보게 되었다.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 60여 명과 출근 중이던 젊은 직원 20여 명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설마, 경찰이 KBS로 들어오려는 것인가. 무전기를 든 그들은 경찰이었다. 정연주 사장 해임 의결과 관련한 KBS 이사회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경찰이 진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본관 출입문 쪽으로 경찰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출근하는 젊은 직원들이 항의하는 소리만 허공을 맴돌 뿐 누구 하나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노조 집행부는 뭐 하는 거지? 아는 얼굴이 보여서 노조 집행부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출입 통제문 위에 올라가 경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러분,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 여러분. 이곳은 여러분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어서 밖으로 나가십시오.”
 

ⓒ뉴스타파 제공2008년 8월8일 정연주 사장 해임 이사회를 앞두고 경찰이 KBS 본관 앞에 차벽을 쌓고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때마침 출근 중이던 이원군 부사장이 경찰 간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내 옆을 지나쳤다. 이원군 부사장이 내 옆을 지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갔다. 잠시 후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과 노조 집행부 몇 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 간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경찰 병력이 본관 문 쪽으로 후퇴하는 듯했다. 경찰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문 쪽에서 20여 분 대기하던 경찰 병력이 증원되자 다시 진입했다. 사복 경찰이 민주광장을 덮고 출입통제문을 넘고 있었다. 언론 자유의 선을 넘어선 것이다. 이때부터 본관 3층 이사장실로 가려는 경찰과 제지하려는 직원들 사이에 대략 두 시간 동안 몸싸움이 있었다. 경찰을 막아선 우리들은 하나하나 끌려 나왔다.

그 일이 있고 한 달여 뒤인 9월17일 밤 10시쯤. 갑작스럽게 인사 발령이 났다. 노조의 미온적 태도에 화가 난 직원들이 ‘KBS 사원행동’을 꾸렸는데 거기에 참여한 47명에 대해 인사발령이 났다. 방송기술 직종에서는 나를 포함해 6명이 사원행동에 가입했는데, 한 명은 남산송신소로, 나머지는 모두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내는 발령은 이전에는 없었다. 황보영근·고우종·이승호·박종원·이상필. 우리는 여의도 본사를 떠나야 했다. 방송은 협업의 결과물이다. 방송기술직은 화면 밖에 존재한다. 엔지니어들의 자부심은 크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마지막 연설을 할 때 방송기술직 엔지니어들의 역할을 떠올린다. 성난 군중을 보여주지 않으려 카메라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마이크를 끄지 않았다. 성난 군중의 함성이 전파를 타고 전해졌고 국민들은 현장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독재자는 물러갔다.

왜 갑자기 인사 발령이 났을까. 나중에 파악해보니, 정연주 사장 해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그때 본관 계단에서 시민들에게 전기를 제공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회사 야간 당직자를 만나 본관 계단 앞에서 전기 사용에 대한 허락을 분명히 받았고, 그분이 가져온 일지에도 서명을 했다. 인사 발령이 나고서 회사 인트라넷에 “저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렸지만 의미 없는 아우성이었다.

중계기술국에서 용문산중계소로 갑작스레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집(서울 강서구 발산동)에서 일터까지 출퇴근 시간만 6시간이 걸렸다. 혼자 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이 매일 밤 떠올랐다. 아마도 이것이 회사 측이 노리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용문산중계소와 여주센터를 오가며 8년가량 일했다. 여주센터가 폐쇄되고 남산센터에서 5개월 일하고 지금은 관악산송신소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본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혼자 마시는 술이 늘고 회사 돌아가는 상황과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사장이 다섯 번 바뀌었다. KBS는 서서히 스스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시사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보도는 국민들에게 외면당했다. 적지 않은 인재들이 KBS를 떠나고, 남은 우리들은 암묵적 방관과 묵인 속에서 철저히 유린당했다. 사원행동 당시 방송기술직에서 가입한 이는 6명이었다. 지금 KBS 새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에 가입한 본사 방송기술직만 120여 명에 이른다.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 증명한다. 누구도 공영방송의 가치를 우리에게 공짜로 주지 않는다. 이번 파업은 그 가치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나도 그 대열에 함께한다.

 

기자명 강남욱 (KBS 방송기술직)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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