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일간의 파업이 끝났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울분을 삼긴 채 일터로 돌아갔고, 파업을 이끌었던 선배들(정영하, 강지웅, 박성호, 이용마, 이상호)은 해고됐다. 후배들의 싸움에 언제든지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 ‘의심받은’ 두 선배(최승호, 박성제)조차 백종문씨(현 MBC 부사장)의 자백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해고를 당했다.

나에겐, 파업보다 더 긴 싸움이 남아 있었다. 정직 6개월. 회사 측이 워낙 징계를 망나니 칼처럼 휘둘러댔기에 해고를 각오했던 처지였고 정직 6개월이라는 ‘관대한’ 처분에 감읍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현실의 고민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가장 큰 고통은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보다 더 일찍 현관문을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문을 나서기는 했지만 갈 곳이 딱히 없었다.

집 근처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는 일은 겨우 한 시간 남짓이면 싫증이 났다. 지인의 사무실에 불쑥 찾아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일도 주변을 지나치는 직원들이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은 민망함에 계속할 수 없었다.  
징계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소파와 뒤엉킨 정물화가 되어갔다. 말수는 줄어들고, 표정은 어두워졌다. 가족들의 눈치 보기는 점점 더해졌다. “아빠 기분 안 좋으니까 말 걸지 마.” 아내의 염려 섞인 말에 괜히 울컥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누군가와 약속을 했다가도 당일 갖은 핑계를 대며 깨뜨리는 일이 반복됐다.
 

ⓒ다음 거리뷰 화면 갈무리MBC 파업 참가자들을 격리해 ‘신천교육대’로 불렸던 서울 송파구 MBC 아카데미 건물.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워졌다. 회사는 이른바 ‘신천교육대’행을 지시했다. 송파구 신천역에 있는 MBC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신천교육대라고 불렀다. 징계의 연속이었지만 반가웠고 행복했다. 기사를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웃음으로 시청자를 찾아가야 할 이들에게 ‘토스트 만드는 법’이나 가르치는 이상한 곳이었지만, 나에겐 이른 아침 가야 할 곳이 생겼고, 반갑게 얼굴을 맞댈 동료들이 있었다.

두 달 남짓한 신천교육대 생활이 끝나자 회사는 다시 ‘유배지’로 불리는 인천총국으로 발령을 냈다. 집에서 멀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야 할 업무가 주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속된 말로 그 공간에 처박아놓고 회사는 끊임없이 ‘너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라’고 을러대는 듯했다.
모멸감. 최근 한 언론에서 화장실 앞에 책상을 두고 면벽해야 했던 직장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는데, 그의 심정이 나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작은 봉투에 짱돌 하나와 함께 담은 사표를 그들의 책상에 던져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러지 못했다. 버텨야 했다.

당장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의 처지도 무시 못할 이유였을 테다. 나의 포기는 곧 그들의 승리를 의미했다. ‘또 한 놈 쫓아냈어’라며 그들이 어두컴컴한 지하방에 둘러앉아 자화자찬하는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인천총국 유배 생활은 법원 판결에 의해 두 달여 만에 끝이 났다. 보도국으로의 복귀. 기자로의 복귀는 아니었다. 마침 사옥 이전을 앞둔 시점에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보도국 사무 공간 배치였다. 사무실도 MBC 밖 타 언론사 건물에 자리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를 유배시키듯 발령 낸 저들의 의도와는 달리 나쁘지 않았다. 보도국에 어울리는 부서 배치와 동선을 고민하고, 동료들이 쓸 책상을 선택하는 일은 잠시나마 보도국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줬다. 기자의 일은 아니었으되 기자인 척할 수 있었다. 복귀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현재 대전MBC 사장으로 가 있는 이진숙씨가 보도본부장에 오른 직후, 보도전략팀에 있던 선배인 박준우 기자와 나, 후배인 김수진 기자가 또다시 보도국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복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의 퇴출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이진숙씨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에 눈엣가시 같은 세 사람을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입사 5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후배도 SNS에서 이진숙씨와 설전을 벌였다는 이유로 보도본부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옮겨간 심의국에서 하루 종일 가요를 듣고 가사를 읽었다. 회사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외부의 모니터를 취합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권력에 굴종하는 방송, 권력자의 심기를 보필하는 방송에 대한 외부 모니터가 좋을 리 만무했다. 내 업무에는 까칠한 모니터 내용을 누군가 보기 편하게 수정하는 일도 덧보태졌다.
매달 한 번씩 프로그램상 시상식장에서 권재홍씨를 직접 대면해야 하고, 간혹 권재홍씨를 위해 의자를 빼줘야 하는 일만 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한 시간이었다. 기자가 아닌 월급쟁이는 절대 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잘난 척깨나 했던 내가 철저히 월급쟁이가 되었던 시절이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이번엔 어디로 보낼까. 은근히 기대조차 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서류 뭉치(절대 엑셀 파일로 만들어졌다는 블랙리스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에 이번에는 어디로 쫓아내야 한다고 쓰여 있을까? 이번에는 드라마 마케팅부다. 드라마 PPL을 담당하는 부서다. 온전히 PPL을 위해 존재하는 부서다. 내게 주어진 업무는 부가 사업이다. 이곳에서도 마땅히 시킬 일은 없다는 얘기다.  
또다시 밥벌이의 비루함을 곱씹으며 시간을 지워나가는 일상의 반복이다. 그 와중에 ‘총파업’이 결정됐다. 싸움의 대상은 2012년과 바뀌지 않았다. 김재철·안광한 전 사장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김장겸 사장과 백종문 부사장 그리고 그들의 추종 세력이 채우고 있다. 여전히 저들 손에는 인사권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가 쥐여져 있다. 제작 거부의 와중에 회사 측은 특파원이나 해외연수, 경제적 보상 따위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며 자기편에 붙으라는 추파를 던지고 있다. 2012년과 다른 점은 있다. 어떤 위법 행위를 해도, 그 위법이 만천하에 알려져도 그들을 감싸줄 이명박·박근혜 같은 ‘뒷배’가 없다.

이번 싸움은 MBC를 진정 시청자를 위한 방송, 시청자들을 위해 존재해 마땅한 방송으로 돌려놓는 출발점이자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지난 수년간 일터에서 배제되고 격리됐던 모두가 제자리에 돌아가 시청자를 위해 보도·제작을 하게 될 것이다.

 

기자명 최형문 (MBC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