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마오쩌둥, 그리고 그와 함께 중국을 이끈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태어난 해는 달랐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1976년 9월7일 서거 이틀 전, 혼수상태에 있던 마오쩌둥은 잠깐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회광반조(廻光返照)였다. 마오쩌둥은 병수발을 들고 있는 근무자가 자신의 의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 다급하게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손으로 자신이 누운 나무침대 가장자리를 세 번 두드렸다. 세 번, 즉 ‘三’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린 근무자가 물었다. “주석님, 일본의 싼무(三木) 소식을 듣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마오쩌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무자는 바로 〈三木武夫(미키 다케오)〉라는 책을 건넸지만, 기력이 없던 마오쩌둥은 가까스로 책을 집어 들고 몇 분 정도 읽더니 이내 또다시 혼절 상태에 빠졌다.

ⓒGoogle 갈무리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왼쪽)과 저우언라이가 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마오쩌둥은 ‘三木’이라는 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려는 듯했다. 그가 알고자 한 三木은 일본 총리 미키 다케오(1907~1988)였다. 당시 중·일 평화우호조약 문제로 일본과 교섭을 해오던 때였다. 마오쩌둥은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연이은 하야가 어렵사리 성사되어가던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 봐 우려했다. 미키는 일본의 자유민주당 총재에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총리의 뒤를 이어 1974년 12월 총리에 올랐다가 2년 뒤 부패 문제로 물러난 일본 정계의 거물이었다. 미키 총리는 1976년 7월27일 다나카 전 총리가 연루된 록히드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다나카는 1974년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 사로부터 6억 엔(약 60억원)에 이르는 금품을 받은 독직 사건으로 실각했지만, 그 전에 중·일 협상을 주도해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낸 거물이었다. 당내 보수파 세력 및 다나카 옹호파가 미키를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고 자민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마오쩌둥이 미키 총리 관련 소식을 알고 싶어 한 이때는 미키가 사퇴를 저울질하고 있던 시점이다. 미키 내각은 1976년 12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 이하 의석을 얻으며 패배하자 책임을 지는 명분으로 물러났다. 결국 미키에 이어 총리로 취임한 후쿠다 다케오(1905~1995)의 재임 때인 1978년 8월, 중국과 일본은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만년에 이처럼 변화무쌍한 일본 내 정세 변화에 줄곧 눈을 떼지 않았다. 1976년 9월9일 0시10분, 마오쩌둥의 숨이 멎었다. 향년 83세였다. 불같은 열정과 카리스마로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 일세를 풍미한 현대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EPA2016년 4월28일 중국 후난성 사오산의 마오쩌둥 광장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 참배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지금도 중국 민초들의 존경과 숭앙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가 타계했을 때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온 조문객 줄이 10리(약 4㎞)나 되었을 정도였다. 저우언라이는 일생 동안 일벌레였다. 중국공산당(중공) 서열 1위인 중공 총서기이자 국가주석과 당 서열 2위인 국무원 총리가 각기 외치와 내치를 나눠서 맡고 있는 오늘날과 달리 마오쩌둥 집권 시절에는 당 서열 3위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외교와 내정은 물론, 때로는 막후에서 전쟁과 군사까지 관장했다.

저우언라이는 왕성한 의욕과 체력으로 마오쩌둥에게 묵묵히 정책을 보고하거나 지시 사항을 일일이 챙기는 등 세심하게 일을 수행했다. 마오쩌둥은 젊은 시절 한때 저우언라이의 아래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단 한 번도 마오쩌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것이 암 발병의 원인이었을까? 저우언라이는 암 발생 후 초기에는 표시를 내지 않고 묵묵히 통증을 견디면서 국사에 매진했다. 다시 병이 재발했을 때는 이미 암이 상당히 진전돼 위독한 상태였다. 

마오쩌둥과 여타 지도자급 인물들이 반강제로 저우언라이를 병원에 밀어넣었다. 저우언라이는 떠밀려 병원에 들어갔지만 입원 중에도 공무를 멈추지 않았다. 병상에서도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처리했다. 1975년 9월 하순부터 병이 더 위독해지기 시작한 저우언라이는 결국 병상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병상에 있던 어느 날, 저우언라이는 혼수상태에서 느릿하게 의식이 돌아오자 침상 머리맡에서 걱정스럽고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를 봤다. 입술이 힘겹게 몇 번 어물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돌보지 않아도 되니… 다른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봐주시오. 나보다는… 그들이 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생을 마감하며 남긴 한마디 “피곤하다”

서거 일주일 전인 1976년 새해 첫날, 저우언라이는 첸자둥(錢嘉東), 자오무펑(趙茂峰) 등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온 비서들을 병상으로 불렀다. 그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기력이 다 떨어진 상태였음에도 오른손으로 ‘평등’을 가리킨 후 비서들에게 힘겹게 겨우 몇 마디 했다. “모두 왔는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전해주게… 피곤하다(累)!” 말이 끝나자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저우언라이 곁에서 8년간 같이 일한 바 있는 비서는 저우언라이가 쉬지 않고 연속 20시간, 30시간 일을 해도 “피곤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에 비서들에게 남긴 말이 “피곤하다!”는 한마디였다. 1976년 1월8일 오전 9시57분, 저우언라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78년을 살면서 혁명의 열정을 불태운 마오쩌둥과 함께 평생을 공산혁명과 건국 그리고 냉엄했던 냉전 시기 내우외환의 상황에 직면해 통치 기반을 닦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간 지도자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두 사람은 공산혁명을 성공시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불굴의 혁명가, 걸출한 정치·군사 지도자였다. ‘계급 없는 평등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및 약소국, 약소민족에게 동지적 힘이 되어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범인류애적인 진정한 박애·평등·정의에 부합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중국과 중국 민족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해서도 최후까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기자명 서상문 (고려대학교 한국전쟁아카이브 연구교수·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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