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 162명은 지난해 7월 △공영방송 사장 선임 시 야당 이사 일부의 동의를 받게 해 사실상 여야 합의를 필요로 하는 특별다수제 도입 △여야 이사 비율 7대6으로 조정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방송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20대 국회에서 야당이 하나로 뭉쳐 발의한 첫 번째 법안이었다. 그만큼 당시 공영방송 정상화 의지는 간절했다. 이 법안은 일명 ‘김재철 방지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재철 방지법’의 핵심은 특별다수제다. 해외에선 영국 BBC와 일본 NHK 등이 특별다수제를 시행한다. 현재 KBS 이사회는 7대4, MBC 사장 선임권을 가지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는 6대3 비율로 여야 추천 이사가 구성되어 있다. 이를 7대6으로 조정한 김재철 방지법은 사장 선임의 경우 이사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 특별다수제를 포함했다. 적어도 야당 추천 이사가 1명 이상 동의해야만 사장을 선임할 수 있다. 특별 다수제는 김재철씨 같은 극단적 인사를 공영방송 사장 후보군에서 배제하며 합의제 정신을 복원하자는 취지가 강했다.
 

ⓒ연합뉴스8월22일 문재인 대통령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부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당시 언론운동 진영 내부에서 ‘김재철 방지법’은 격론의 대상이었다. 여야의 입맛에 모두 맞는 사람이 아니면 공영방송 사장이 될 수 없다는 대목이 ‘양날의 검’이었다. 시민사회에서 볼 때 적합한 공영방송 사장 후보일지라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있을 경우 결국 무색무취의 인사가 사장으로 선임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법안 발의 당시에는 이 같은 격론이 공개적으로 분출되지 않고 수면 아래 있었다. 김장겸 당시 MBC 보도본부장 때문이었다.

당시 야당과 언론운동 단체들은 차기 MBC 사장 인선에 주목했다. 김재철 체제에서 정치부장-보도국장-보도본부장 등 요직을 맡아온 김장겸 본부장이 사장으로 선임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야당은 여야 모두에게 독배가 될 수 있는 이 김재철 방지법을 발의하며 당시 새누리당의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정작 새누리당은 법안에 대한 논의조차 거부했다.

법안 발의 이후 박근혜 탄핵→조기 대선→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진 정치 지형의 급격한 변화는 ‘김재철 방지법’에 대한 재논의 여론을 형성했다. 언론 적폐 청산에 대한 열망이 촛불로, 또 투표로 표출되었다. ‘최소한 김재철 같은 사람은 오면 안 된다’가 아니라, ‘김재철이 망쳐놓은 공영방송을 복원할 사람이 와야 한다’는 요구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이용마 MBC 해직 기자를 만나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강조하며 이런 열망에 화답했다.

8월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이 법안(김재철 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어느 쪽으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사장으로 선임되지 않겠느냐.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밝혔다. 대통령이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격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문 대통령은 현 상황에서 특별다수제가 공영방송 정상화를 가로막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여야 모두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 양산 법”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에서 최근까지 노조 집행부를 맡았던 한 조합원은 “그 법을 지지하는 MBC 구성원은 한 명도 없다. 현재 보도국 출신의 무색무취 인사 20여 명이 사장 후보로 뛰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라고 말했다. 이 조합원은 특별다수제의 문제를 이렇게 빗댔다. “지금 특별다수제를 채택하면 예를 들면 최승호(〈뉴스타파〉 PD)·정찬형(tbs 대표)·손석희(JTBC 보도담당 사장) 같은 개혁적인 선배들이 MBC 사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디어 오늘김장겸 MBC 사장(위)은 최악의 사장으로 꼽히는 김재철 사장 밑에서 정치부장-보도국장-보도본부장 등 요직을 맡았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을 만났던 이용마 MBC 해직 기자도 “이른바 ‘김재철 방지법’은 여야 모두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하는 법이다. 야당이 공영방송 사장 임명을 방해하는 걸 합법적으로 용인하는 법이다. 당연히 폐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KBS 출신의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다시 풀고 시작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으로 놔둘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언론운동 진영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방송법 개정안을 ‘김재철 방지법’이면서 동시에 ‘최승호 방지법’이자 ‘손석희 방지법’으로 해석한다. 파업에 나선 MBC 노조 내부에서도 지금껏 이 법에 대해 단일한 의견은 없었다. 학계에서도 “특별다수제만으로 훌륭한 사장 선임을 보장할 수 없다(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라는 주장이 있지만 논의가 본격화되지는 않았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여당 간사인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재철 방지법’과 관련해 “야당에 유리한 법인데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 현재 고대영 KBS, 김장겸 MBC 체제를 하루라도 더 연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메시지에 따라 현재 지배구조 개선안을 재검토 중이다”라고 말했다. 김동원 전국언론노조 정책실장은 “지난해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최선의 법안이 아니었다. 변화된 상황에 맞춰 가장 공정한 사장 선출 방식을 원점에서 재논의하겠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공영방송 사장 선출 방식이 언론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학 박사이기도 한 이용마 해직 기자가 제안한 방안은 국민대리인단이다(38~41쪽 기사 참조). 무작위로 선출된 국민대표 수십명이 사장을 뽑는 방식으로,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단을 차용했다. 해외 모델 중에는 독일의 공영방송 ZDF 방식이 거론된다. ZDF 최고운영자는 방송평의회의 5분의 3 이상 동의가 있을 경우 임명된다. 무보수 명예직인 방송평의회 위원들은 60명 수준으로, 종교·교육·과학·예술·노조 등 각계를 대표하도록 구성돼 있다.

새 정부 방송통신위원회도 최근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자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새로운 지배구조 개선 논의에 시간이 소요되는 가운데 국회에서 이렇다 할 여야 합의안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 MBC 관리감독 기관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8월에 기존 6대3 구조로 새 사장을 선임한다.

결국 김재철 방지법은 차기 MBC 사장을 앞둔 지난해 김장겸씨와 같은 인사를 막을 만한 방안이 꼭 필요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판’이 달라졌다. 지금은 지배구조 개선보다 적폐 청산이 먼저라는 게 파업에 나선 공영방송 구성원을 비롯한 언론운동 진영의 판단이다.

 

기자명 정철운 (〈미디어 오늘〉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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