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은 (브렉시트를 통해) 영국을 ‘글로벌 싱가포르’로 만들려고 했다.”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폴 메이슨이 보수당의 총선 패배를 다룬 〈가디언〉 기고문(6월12일)에서 한 말이다.

브렉시트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일컫는다. 지난해 6월 영국은 국민투표에서 EU 탈퇴를 결정했다. 그 결과 올해 6월19일부터 EU와 2년에 걸친 탈퇴 협상을 벌인다. 테리사 메이 총리와 보수당 정부는 영국 유권자들의 지지를 업어야 탈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며 2020년 예정된 총선을 협상 직전인 6월8일로 앞당겼다. 그래서 선거운동 초기, 상당수 언론은 보수당이 의회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했다. 당시 보수당 의석은 330석으로 과반(영국 하원은 모두 650석으로 과반은 326석)을 약간 웃돌았다. 메이는 대처 전 총리의 별명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영광’을 누렸다.

ⓒAFP PHOTO6월8일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놓친 영국 보수당의 테리사 메이 총리.

정작 6월8일 총선에서 메이는 운명으로부터 처절하게 농락당하고 만다. ‘담대한 시도’가 자충수로 작용했다. 보수당 의석이 318석으로 이전보다 12석이나 줄었다. 급진 좌파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은 의석을 30석이나 늘렸다(262석). 그다음으로는 스코틀랜드국민당(56석에서 35석으로), 자유민주당(8석에서 12석으로), 민주연합당(8석에서 10석으로) 순이다.

사실상 승자는 보수당이 아닌 노동당이었다. 보수당은 1당 자리를 지켰지만 과반 의석까지 놓쳐 단독정부도 구성할 수 없게 되었다. 가까스로 극우 성향인 민주연합당의 지지를 끌어내 소수정부를 꾸리기로 했다. 메이는 ‘철의 여인(Iron Lady)’에서 ‘아이러니한 여인(Irony Lady)’ 혹은 ‘여성 사형수(Dead Woman Walking)’로 전락했다. 메이가 곧 총리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담겼다. 저널리스트 메이슨 식으로 표현하자면, 메이 총리는 ‘싱가포르 만들기’ 작전이 성사되기 일보 직전에 주저앉고 말았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대표적 ‘금융 중심지’다. 정치적으로는 아직 태형이 시행되는 권위주의 국가이지만, 시장 자유도에서는 세계 최고다. 외국인이 쉽게 법인을 설립할 수 있으며, 자금 유출입 규제가 약하다. 법인세율도 17%로 매우 낮은 편이다. 그 덕분에 초국적 기업이나 초부유층들이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한 뒤 자금을 쌓아놓거나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 조세도피처라 불리는 이유다.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작은 정부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IMF 자료(Economic Outlook)에 따르면, 2016년 싱가포르의 ‘국민총생산 대비 정부지출’은 18.78%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참고로 한국은 20.70%다. 같은 시기, 영국은 40.25%다. EU에서는 하위권이지만, 싱가포르의 두 배다. 결국 ‘글로벌 싱가포르’는, 영국 사회·경제 체제의 파격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외자 유치에 유리한 제도들(저세율·저복지 등)로 무장한, 권위주의적인 ‘작은 정부’를 갖춘 나라다. 실제로 메이 총리가 표방했던 ‘강한 브렉시트(Hard Brexit)’ 전략을 감안하면 다른 길이 없기도 했다.

이번 영국 총선은, ‘강한 브렉시트’ 대 ‘부드러운 브렉시트(Soft Brexit)’의 각축장이었다. ‘EU 탈퇴’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EU 회원국들은 ‘네 가지 자유’를 누린다. 상품·서비스·자본·인력을 다른 회원국으로 이동시키는 자유다. 영국 기업은 프랑스에 무관세로 품목 제한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다(EU 단일시장 접근권). 독일 은행은 별다른 규제 없이 이탈리아에 지점을 설립해 보험 상품 판매에 나선다. 시민들 역시 EU 내에서라면 어떤 회원국으로든 자유롭게 이동해서 직업을 갖고 거주할 수 있다(이민).

EU “영국의 시장 접근권 허용할 생각 없어”

ⓒEPA6월8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총선 결과가 발표되자 노동당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의무이기도 하다. 다른 회원국의 국민이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겠다면,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영국의 경우, 2004년에 폴란드·체코 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EU에 가입한 뒤 이민자가 폭증했다. 2014년 현재 800만명을 웃돈다. 이로 인한 외국인 혐오 정서가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가장 큰 이유다. 다른 의무도 있다. EU 회원국들은 국가주권을 일부 포기해야 한다. EU 차원에서 노동권·기업·재정·산업정책·환경·소수자·이민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회원국들에게 동일한 규범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노동권 등 인권 부문의 EU 규범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EU를 탈퇴하는 영국 처지에서는, ‘케이크 위에 얹힌 체리만 쏙쏙 빼먹는(Cherry Picking)’ 것이 제일 좋다. 외국인들의 영국 이주는 통제하되, EU 시장에 대한 접근권은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브렉시트를 주장해온 영국 정치인들은 ‘체리만 빼먹을 수 있다’고 선전해왔다. 이에 대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EU 수뇌부는 ‘이민을 통제하려면, EU 시장에 대한 접근권도 포기하라’는 단호한 입장을 지켜왔다.

영국의 수출품 가운데 60% 정도가 EU 회원국으로 간다. EU 시장에 대한 무관세 수출이 불가능해지면 엄청난 타격이 생긴다. 지난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총리로 취임한 테리사 메이의 고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지난 1월 중순께 결단을 내렸다. “명확히 말씀드린다. 영국이 이민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EU를 탈퇴할 이유가 없다.” 6월19일부터 진행될 EU와의 협상에서 EU 시장에 대한 영국의 접근권(품목 제한 없는 무관세 수출)을 포기하더라도, ‘이민 통제’ 부문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자격으로만 EU와 교역할 수 있다.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한국보다 오히려 불리한 교역 조건을 적용받을 것이다. 이른바 ‘강한 브렉시트’다.

이에 비해 제1야당인 노동당은 물론 스코틀랜드국민당, 그리고 보수당의 협치 파트너인 민주연합당까지 ‘부드러운 브렉시트’를 주장해왔다. 심지어 자유민주당은 ‘브렉시트 반대’다. EU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유지하자는 것이 ‘부드러운 브렉시트’의 핵심 내용이다. 벤치마킹할 대상도 있다. 예컨대 노르웨이·아이슬란드·리히텐슈타인·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EU 회원국이 아니다. 그러나 EU와 무관세로 교역한다. 대신 EU 예산에 대해 분담금을 낼 뿐 아니라 회원국의 이민도 받아들여야 한다. 즉, ‘부드러운 브렉시트’는 이민 통제를 포기하거나 크게 완화하더라도 EU 시장 접근권만은 유지하자는 견해이다. 어떻게 보면 ‘브렉시트’라고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다. 메이 총리가 “야권이 민주주의를 우습게 본다(브렉시트는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됐다). 나쁜 협상을 하느니 차라리 파탄시키는 것이 낫다”라고 공언한 이유다.

문제는 ‘나쁜 협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EU 수뇌부 측은, 이민을 통제하는 영국에게 시장 접근권을 허용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 더욱이 EU 규범에 명시된 ‘탈퇴 합의금’까지 영국 정부에 요구할 계획이다. 양측이 염두에 둔 금액의 차이도 크다. EU 측은 600억~1000억 유로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측의 생각은 최대 200억 유로 정도다. 협상 분위기가 험악하게 흐른 끝에 영국 측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조세도피처 출현할까?

그런데 지난 1월 중순 필립 해먼드 영국 재무장관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영국이 유럽 스타일의 세금제도와 규제, 경제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영국을 고립시킨다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다른 모델로 바꿀 수밖에 없다.” 〈가디언〉(1월15일)은 이 발언을 ‘시장 접근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 영국을 조세도피처로 만들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REUTERS6월1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영국은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자유시장도가 강한 나라로 분류되지만, ‘큰 정부·노사교섭·복지’의 틀을 그럭저럭 유지해온 유럽 스타일(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속한다. 이런 영국이 법인세율을 아일랜드(EU의 조세도피처에 속하는 국가다) 수준(12.5%)으로 낮추고, 국제 자금의 유출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이와 함께 노동권·환경 등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복지 수준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시장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런 조치들은 ‘국가경쟁력 강화 정책’으로 해석된다. 유럽 대륙의 기업과 자금이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으로 쇄도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초국적 기업과 초부유층의 탈세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국제 규범을 제정해온 EU 수뇌부는, 거대한 조세도피처의 출현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EU에 대한 영국의 ‘멋진’ 복수다.


다만 이 같은 ‘강한 브렉시트’로 영국을 ‘글로벌 싱가포르’로 전환시키려면, 시민의 반발을 꺾을 수 있어야 한다. 메이 총리가 조기 총선을 통해 “강력하고 안정적인” 권력을 얻으려 한 이유 중 하나일 터이다.

이처럼 브렉시트는 단지 영국과 EU의 다른 회원국 간 관계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이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에 대한 노선 투쟁이다. 노동당의 대표 제러미 코빈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5월 쇠락한 공업도시 맨체스터 유세에서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이번 총선의 주제는 브렉시트가 아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자체는 이미 확정되었다.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은 어떤 나라로 갈 것인가’이다.”

코빈은 스스로 답변했다. “일자리 우선(jobs-first) 브렉시트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민 통제’를 폐기하더라도 EU의 광대한 시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와 함께 ‘재정긴축 반대’ ‘교육예산 증액’ ‘철도 재국유화’ 같은 공약으로 코빈은 젊은 유권자들을 봉기하게 했다. 대다수 현지 언론과 금융기관들은, 테리사 메이와 보수당의 ‘강한 브렉시트’에 대해 ‘이미 좌초했다’고 결론지었다. 의회 과반수도 차지하지 못한 보수당으로서는 단독으로 EU와 협상을 수행하기 힘들다. 국내 개혁용 법안들도 통과시킬 수 없다. 결국 ‘부드러운 브렉시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 보수·극우 정치세력이 주도해온 브렉시트 논란은 거대한 코미디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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